뛰어가는 순간
아침 해가 떠오르며 분주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닭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사람들을 깨워댔다.
사람,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저마다 몸을 일으켜 하루를 맞았다. 눈을 비비며 씻고, 아침을 차리고,
전날 늦게 잔 여파를 부여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 한 가지, 하나만 빼고.
벌써 한 시간 전부터 미숙은 "하나야, 일어나!" 하고 외쳤지만, 방에서는 기척조차 없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꿈나라 어딘가를 열심히 헤매고 있는 듯했다.
시간은 오전 8시 40분.
10분 전쯤, 하나의 부모님은 익숙하게 채비를 마치고 텃밭으로 나간 뒤였다.
조용한 집 안, 식탁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건— 이상하게 익숙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일— 그건 호수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것도, 늘 해오던 일이었다. 호수는 눈을 감았다.
숨이, 천천히 들어오고 나갔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숨길이 부드럽게 흘렀다.
문득, 어제 하나가 말했던 게 떠올랐다.
바람의 언덕.
그곳에 가면 그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햇살을 머금은, 그 아이의 얼굴이 궁금했다.
왜 이 마을에서, 그 아이에게만— 그토록 맑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걸까.
기억 속 어머니의 얼굴. 아버지의 무거운 뒷모습. 그들 곁엔, 항상 회색의 한기가 있었다.
호수는 생각을 내뱉으며, 들숨과 날숨의 결을 따라갔다.
오늘의 기대가 어떤 일을 심어줄까. 그 설렘이 마음을 타고, 온몸을 한 바퀴 돌아 흐르는 듯했다.
하나는 바람의 언덕에 있었다. 햇빛이 어쩐지 오늘은 더 따뜻했다.
걸음도, 평소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 감촉을 더 선명히 느끼고 싶어 하나는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살풋이 풀 위에 발을 디뎠다. 촉촉한 흙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고,
숨이 깊게 트였다.
그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하나는 언덕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머리칼을 스쳤다. 그리고 뺨을, 살짝 지나갔다.
마치 강아지를 쓰다듬듯- 조심스럽고,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조금만 더 달리면, 나무 그늘이 땀을 식혀줄 것이다.
그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하나는 막판 스퍼트를 냈다. 그런데-
그 끝에 나무 대신,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지난번 해변에서 마주했던 그 뒷모습.
호수였다.
아지트를 또 빼앗겼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하나는 더 세게 달렸다. 다섯 걸음, 네 걸음, 셋…
그때-
호수가 고개를 돌렸다. 활짝 웃고 있었다.
환하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멈춰야 하는데. 이러다간- 아니, 이러면-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달리는 발은 멈추지 못했고,
호수는 조심스레 팔을 벌렸다. 하나가 그 품에 그대로 품어졌다.
닿은 숨이, 심장이, 온몸이 뛰었다.
이건 내 심장일까, 호수의 심장일까.
두 소리가 점점 똑. 딱. 똑. 딱. 서로를 맞춰가기 시작했다.
똑. 딱. 똑. 딱.
점점 머릿속이 울리고, 풍경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호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아니라
따스한 온기를 내는 손이, 조심스럽게 이마를 쓰다듬었다.
머리칼이 가린 눈을 걷자 보이는 눈.
똑딱. 똑. 딱.
이건, 누구의 소리일까.
감긴 눈이 따가웠다. 그리고, 뜨거웠다.
하나는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꿈을 꾼 직후, 사람들은 대부분 절반 이상을 잊는다고 한다. 그런데 왜 나만.
이를 닦으면서도, 머리를 감으면서도, 이불을 개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왜 그 기억만은 머릿속에서 점점 더 몸집을 키우는 걸까.
요즘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하나는 투덜거리며 빨간 체크남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왜.
터벅-
호수가.
터벅-
내 머릿속에.
터벅, 터벅.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생각의 흐름을 따라갔다.
갓 걸음을 배운 아이처럼, 하나는 계단을 한 발, 또 한 발. 천천히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가까워질수록, 시공간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건 내 눈일까. 아니면 몸일까.
정말로 집이 흔들리는 걸지도 몰라.
호수의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감고 있는 눈.
저번부터 느꼈지만, 저 아이 앞에만 서면 내 눈과 머릿속은 풀숲을 헤매는 날벌레처럼 산만하고 복잡해진다. 그런데 왜 저 아이는 마치 혼자 다른 시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숨을 위아래로 고요하게 쉬고 있는 걸까.
얄밉다. 진심으로 얄밉다.
어디 달나라라도 다녀오는 건지—사람이 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기척 한 번 없다.
아니,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는 머쓱한 공기를 ‘쓰읍—’ 하고 들이마셨다.
괜히, ‘콜록.’ 기침 소리도 내보았다.
호수는, 마치 비 온 뒤 조심스레 기어나오는 달팽이 같았다.
서서히 눈을 뜬 그는 한 번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그제야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은 너무도 느렸다. 물론, 뛰고 달리고 뭐든 메뚜기처럼 튕겨 다니는 하나와는 정반대였기에
더 느리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안녕.”
“응, 안녕….”
하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모기가 참 많지?”
차마 ‘잘 잤어?’ 라는 말은 몸을 스치고 지나간 어떤 이상한 바람 때문에 끝내 꺼내지 못했다.
그 대신, 모기 이야기를 꺼냈다. 뭐, 밤새 안부를 묻는다는 점에선 같은 말이니까.
“그럼, 이제 갈까? …뭐, 안 먹어도 되지?”
하나는 말을 툭 던지듯 남기고 현관으로 나섰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호수의 눈을 마주보는 게 어려웠다.
아마… 꿈 때문일까. 아니. 그건 그냥, 호수의 눈 때문이었다.
호수는 아마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것이다.
그 정도 반응쯤은 이제 익숙하다.
등 뒤로 따라붙는 조심스러운 기척.
호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하나는 괜히 더 서둘러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아빠가 서 있었다.
“어, 일어났네. 안 그래도 깨우려던 참인데. 둘 다 차에 타. 읍내 가야 돼.”
“읍내? 왜요?”
“방앗간도 가고, 비료도 좀 사고.”
“…그래서 우리가 왜요?”
“왜? 뭐 약속 있어?”
하나는 뒤에 서 있는 호수를 슬쩍 돌아봤다. 호수는 그대로,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아지도 아니고… 그 눈빛에 어쩐지 미안해져서, 하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