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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Sep 29. 2020

내가 이렇게 화가 많은 사람이었나

내가 나를 모르는데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알죠

마음을 곱게 먹어야 하는데 요즘은 그래 지지가 않는다. 이럴 때에는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열불 천불이 나서 분노의 타이핑을 시작해본다.


나처럼 화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참으로 평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딱히 화나는 일이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나는 평탄한 라이프를 즐기고 살았다. 학창 시절이 지나고 대학교의 팀플에서 갖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은 아름다웠다. 누군가와 싸울 일을 만들어 본 적이 없고, 문제가 생기면 화가 나기보다는 침착하게 이해를 해보거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탁자를 뒤집어엎을 정도로 화가 나거나 내 감정 때문에 누군가와 언성을 높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말을 듣는 나는 정말, 둥글둥글하고 평온한 사람이었다. 그런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착한 아이 콤플렉스?


첫 입사 후,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도 앞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남겨주고 싶었다. 학교에서 그래 왔듯이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착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거절이라는 것이 어려워졌다. 어디에서 선을 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회 초년생이 겪는 당연한 절차겠지만, 친구사이와 직장에서 비즈니스로 엮인 사이, 그 관계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이다. 내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에도 나는 허허 웃으면서 예스 예스, 즐거운 반응을 했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리액션은 사람에게 불편한 감정을 일으킨다. 보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


A대리님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이자 그 날의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 밝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면이 그의 첫인상이었다. 내 입사 동기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그가 하는 모든 잡담을 함께했다. 그와 함께하면 회사의 인싸가 되는 것 같은 흐름이었다. A대리님이 시작한 이야기에 주변의 모두가 업무를 멈추고 잡담을 함께했고, 조용하던 사무실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그가 다녀온 곳, 어제 있던 일과 10년 전의 추억, 업체 사람들, 친구와 애인, 그들의 가족, 사돈의 팔촌 그 주변의 모든 이야기까지 모두가 알게 될 즈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주변을 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입을 닫게 하고 있다는 것을. A대리님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그곳이 사무실이건, 식당이건, 주변은 방청객이 되어야 했고, 그는 모두의 관심과 리액션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그 사이에 모두의 시간이 흘러가고, 모두의 이야기도 묻혔다. 대화와 관계는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짐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그의 애청자인 사이, 그는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 어떤 것에도 관심을 주지 않는 일방적인 관계가 되어갔다.


나는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척, 리액션 하기가 점점 피곤해졌다. 그 피곤함에 어느 날부터는 화가 났다. 조용히 다른 사람들과 밥을 먹고 쉬고 싶어서 A대리님과 함께하는 식사를 차차 조금씩 피했고, 그가 무슨 이야기를 시작하건 내 일을 했다. 처음엔 대리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에게 나의 존재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그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고 신경을 쓴 나 자신이 머쓱하더라. 내가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서 멀어진 사람들이 있다는 점은 조금 안타까웠지만, 그 자리에 없는 나의 마음은 매우 편했다.


불편한 사람은 무시하면 된다. 내가 편하지 않은 사람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걸 나는 그때에서야 깨달았다. 내 앞에 당장 쌓인 일들이 더 중요하고, 거기에도 에너지를 쏟기 바빠서 귀찮다 못해 화가 나는 관계까지 신경 쓰기보다는 그냥 무시하는 것이 편하다는 걸.


네, 저는 당신이 싫어요


B팀장님이 있었다. 그의 업무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업체 관리도, 팀의 업무 분담도, 정확하고 깔끔하게 진행하는 그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했다. 그는 조용조용한 사람이었는데, 같이 협업할 일이 없던 팀이라 그와는 큰 교류 없이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가 우리 팀을 대하는 데 냉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별하지 않은 문의에 시큰둥하게 답하거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모습이었다. 그 반응의 원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어떤 사건도 없었다는 것이 나는 당황스러웠다.


사무실의 분위기에 변화가 있었다. 누구도 이렇다 말을 하지 않았고, 어떤 설명도 없었지만 직감으로 느껴지는 그 적대적인 분위기란 정말 오묘한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은 공기 속에 떠다니면서 덩어리를 이룬다. 이번에 만들어진 그 덩어리는 나를 향해 다가오는 먹구름이었다. 얼마 후 우리 팀만 뺀 회사 단체 채팅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택근무가 진행되는 사이 그들끼리는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먹구름 같은 분위기의 형성과 그 실체인 단체방의 뒤에 모범적이고 조용한 B팀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유치하게도 직장 내 따돌림으로 밖에 명명할 수 없는 그 행동의 원인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나를 싫어할 수는 있지만, 문제가 있으면 해결했으면 한다.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일을 엮는 일은 어디에서도 없었으면 한다. 처음에는 이해를 해보려 노력했다. 어떤 점에서 오해가 있었을 거야, 뭔가 노력을 하면 될 거야, 사람은 원래 좋은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싸그리 무시한 채 비롯되는 사건들에 결국은 화가 쌓여갔다. 감정적인 대응, 일관성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행동들에 화가 났고, 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무실에서 깔깔대는 그 목소리들에 화가 났고,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압박감에 화가 났다. 나중에는 눈빛 하나, 사소한 행동에도 짜증이 나고 화가 나서 욕이 절로 나왔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내 우울증에 영향을 미친 원인이 사람들에게 있음을, 병원을 찾아가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두 달을 사무실 밖에서 일하면서, 온전히 내 정신건강에만 신경 썼다. 굳이 남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악감정에 에너지를 빼앗겨봤자 아픈 건 나뿐이다. 싫어하는 음식은 안 먹으면 그만이다. 사람 관계도 똑같다. 싫은 것을 싫다고 공공연하게 인정해버리는 것이 나의 멘탈에는 좋다. 싫어하는 것에 원인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굳이 그걸 없애버린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싫은 것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분노에 파묻히지는 말 것


어제의 나는 화가 없는 착하고 둥글둥글한 사람이었다가, 오늘의 나는 마음속에 불덩이로 가득 찬 사람이기도 하다. 누구나 잘 믿는 사람이었다가,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온 세상이 아름답고 선해서 온종일 행복하다가도 모두의 마음속엔 사악함이 가득하다고 나 혼자 고통받기도 하듯이, 나조차도 나를 잘 모른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해서 누군가가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건, 그날 당신이 본 내 모습이 나의 전부아니다. 어제는 뾰족뾰족한 가시로 덮였던 내가, 축축하고 어두운 지하 어딘가까지 추락했다가도, 시간이 지나 둥그런 마음이 되는 다음 날이 있다.


그러니 순간의 감정에 파묻혀 애꿎은 나를 분노 속으로 가라앉히지는 말아야 한다. 화가 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싫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되 이해하지는 말자.

굳이 모든 것에 신경 쓰기 않기 위해,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알죠?

나는 당신을 모르니까, 다 아는 척하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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