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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Mar 03. 2023

오전 10시에 부자가 되어봤다

3월 2일의 기록

오늘이 날이다. 

오늘은 내가 타락하는 마지막 날이다. 

오늘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먹고싶은 것을 먹을테야. 왜냐면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할 것이기 때문이지. 


새벽 2시에 노량진 수산시장에 다녀왔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잠들었던 뇌와 몸이 서로 싸우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가며 도착한 수산시장은 아침 8시의 출근길 같았다. 조용하지만 모든 것이 바쁘게 움직였고 누구나 표정이 굳어있었다. 나에게는 그저 타락을 위한 조금의 부지런함이었지만 여기있는 모두에겐 이 것이 당연해보였다. 따로놀던 뇌가 제 자리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사온 해산물을 두고 다시 눈을 붙였다가 떴다. 오전 10시. 청하 두 병과 소맥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영상에서 열심히 본 것과 같이 세팅했다. 어렵지가 않다.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새벽인지 알게 뭐야. 참치와 우니를 한 번에 올려 부자가 된 기분으로 입속에 와악 넣는다. 청하가 꼴꼴 들어간다. 이건 낮 술이 아니고 아침 술이다. 그렇게 장장 4시간에 걸쳐 브런치로 날것과 청하를 즐겼다. 눈앞에 틀어둔 넷플릭스에는 지금 이 시간과 상반되는 심야식당 극장판을 틀어두었다. 완벽하게 만족스럽다. 


오전 10시에 부자가 되어봤다. 밖에서 사먹으면 비싼 음식을 한 입에 올려 먹기도 하고, 한량이 된 것 마냥 오전부터 알콜을 들이켰다. 엄마가 보면 등짝을 맞을 장면이지만 더 이상 아랑곳하지 않는 지금 내 나이는 서른이 넘었다. 음, 생각해보니 오전 10시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 보다는 오전 10시에 어린이가 되었다 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보호자의 관찰이 없어서 놀이터에서 지 하고싶은대로 다 해버린 다섯살짜리 애. 


4시간 후, 알딸딸 해진 기분에 잠시 누웠다가 눈을 떴는데 세상에, 저녁 7시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참치와 우니의 조합은 완벽했으나 어마어마하게 느끼했다. 뱃속에서 원유를 잔뜩 실은 배가 전복한 기분이다. 기름이 유출되어 온 뱃속이 시꺼먼 기름으로 가득찬 느낌.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읽고 싶은 책도 있었고 카페도 가고싶었지만 요렇게 휙, 평상시에는 그렇게도 안가는 시간이 오늘은 팔랑팔랑 얇디 얇은 성경책 한 장 넘기듯 지나갔다. 뭐, 이것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그저 해보니까 매일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이 느껴졌을 뿐. 타락의 댓가는 느끼함이라는 것이 느껴졌을 뿐. 그래도 일어나서 운동화를 사러갔다. 움직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음날 오전 7시, 운동을 하고 출근에 성공했다. 아마 앞으로 한 1년은 참치 생각도 우니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다. 식단에 돌입하는 마음이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하고싶은 것의 끝판왕까지 깨고 나면 그 넥스트 레벨은 또 다른 하고 싶은 것이 생기는 걸까. 해보고 나니 이런 행동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주 작은 일탈에 한해서 말이다. 쳇바퀴 굴러가듯 똑같은 일상 사이에 틈이 조금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틈을 자꾸 벌려서 조금 다른 생각이 조금씩 스며들어오길 바랐다. 물론, 출근하고 나면 순식간에 인간 혐오에 사회 혐오로 돌아가버릴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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