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둘 수는 없으니까요
2년간의 결혼 & 내 집마련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동안 일이 재미없다던가, 그만두고 싶다던가 하는 마음은 뒷전에 던져두고 이 프로젝트에 몰입했습니다. 회사일을 되든 말든 대충 방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 준비, 주택 매매 준비를 하다 보니, 한 푼 한 푼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이 일을 절대 그만두면 안 되겠다, 내년 월급은 손톱만큼이라도 더 올려야겠다 생각하고 소처럼 우직하게 일했더라고요. 그 결과로 오히려 연말 성과 평가에서 상위 등급을 받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이 생각을 좀 꺼내놔 볼까 합니다. 그냥, 요즘 일이 정말 하기 싫거든요. 그걸 내가 그걸 어떻게 해냈나, 돌아보면 좋겠다, 하는 날이라서요.
결혼이라는 것, 먼 옛날 하얀색 레이스 식탁보 둘러쓰고 놀이할 때 그렇게 로맨틱해 보이던 그것은, 사실 일생일대의 고난도 프로젝트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어디 남의 말이나, 주변 눈치나, 내 욕심이나, 돈에 끌려가다시피 할 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 간의 관계를 조율해 가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는, 그런 집중력을 요하는 프로젝트요. 드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목표가 필요했습니다. 저의 목표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면서도 절대 과소비를 하지 않는 결혼" 이자, "가장 중요한 것들을 챙기는 결혼"이었답니다.
그렇게 목표에 맞춰, 아끼지도 않고 너무 오버하지도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적당한 선에 맞춰 식장을 잡고, 스드메의 난관을 지나 상견례 코스까지 쭉 뽑아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제 오랜 꿈이었던 내 집 마련을 해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알아보고, 돌아다니고, 가진 자산 계산해서, 악착같이 아끼고 모으는 과정 끝에 말이지요. 이 과정이 지금 돌아보면 꽤나 스펙터클했는데도 저는 지칠 줄을 몰랐습니다.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모든 선택에서 목표를 이루었고, 가장 중요한 것을 챙겼고, 마침내 그 모든 과정을 끝냈으니 말이에요. 이 것이 어찌나 큰 원동력이 되던지, 왕복 3시간~4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아침에 눈을 번쩍번쩍 잘도 떠서는 어두컴컴한 아침 출근길을 성큼성큼 나섰더랍니다. 난 해낼 수 있어, 이 프로젝트를 성공해내고 말 거야.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돌아보니 삶의 원동력이 회사 밖에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멋진 일이었습니다.
오래전 회사 일이 곧 나이고,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내 삶이던 때가 있었어요. 결과는 우울증과 공황장애였고요. 그런 삶으로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근 몇 년간 저는 회사에서는 '자아'를 빼고 일을 합니다. 우울하게 생각하면 회사의 부품이자 인간 톱니바퀴 정도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런 느낌이 드는 자아까지 없애버리고 사무실에 출근해야 했습니다. 진짜 나의 자아는 회사 밖에 있었으니까요. 나의 회사 밖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과정에서의 즐거움을 최대치로 찾기 위해 나는 회사를 레버리지로 썼습니다. 내 미래를 위한 투자를 위해 날 부품 따위로 생각하는 회사를 레버리지로 쓴다는 것 자체가 돌이켜보면 뭔가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했지요.
아, 그렇다고 월급루팡이나 할 수는 없었습니다. 철밥통 철밥통 하는 공무원은 어떤지 제가 안 되어 봐서 모르겠지만, 사기업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성과가 안 나오고, 성과가 안 나오면 결국 내 자리 하나 없어지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요.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잘해서 레버리지의 효과를 극대화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누가 알아주던 아니던.
자아를 밖에 버리고 왔다고 해서 아무 생각이 안 들진 않습니다. 와 진짜 일하기 너무 싫어요. 이걸 꼭 해야 하나? 이걸 왜 내가 하나? 이거 한다고 뭐가 되나? 이런 생각, 당연히 듭니다. 그렇지만 애써 지워봅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냥 다 나자빠지고 싶거든요. 괜히 스트레스만 더 받습니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머리 싹 비우고 눈앞에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일을 단계별로 쪼갰습니다.
A라는 거대한 프로모션을 해내야 한다고 봅시다. 여러 내부 부서와의 협업과 동시에 업체와의 의견 조율도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일정에 맞춰서 디자인 뽑아내고 노출 계좌 잡고 세팅도 해야 합니다. 계약서도 써야 되고 정산까지 해내야 합니다. 상부 승인도 얻어야 하니 품의도 써야겠죠. 이 모든 프로세스를 알고 있는 나는 어깨가 무겁습니다. 너~무 하기가 싫어요. 이럴 땐 이 거대한 일을 잘게 잘게 파 썰듯이 썰어봅니다. 거대한 파 한단이 얇디얇은 파 고명이 될 때까지 아주 작은 단위로 말이에요. 그걸 캘린더에 일자별로 배치합니다. 1개의 프로젝트를 30개의 작은 프로젝트로 바꿉니다. 하루에 하나씩만 해도 30일이면 끝납니다.
그 거대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나는 오늘의 프로젝트 1개를 끝내면 됩니다. 매일매일, 끝내고 나면 생각보다 성취감도 꽤 있는 편입니다. 칼퇴를 위해 퇴근시간 딱 맞춰서 끝내면 짜릿하거든요. 그렇게 끝나고 집에 가고, 임장도 가고, 결혼식 준비도 하고, 저는 그랬습니다. 그러니 사는 게 꽤 즐거웠던 것 같아요.
요즘 결혼 및 내 집마련 프로젝트를 끝낸 자아가 자꾸 회사까지 놀러 옵니다. 심심해졌나 봅니다. 이걸 내가 왜, 이거 해서 뭐 좋나, 이런 생각들이 들기 시작하면, 회사가 너무 싫어집니다. 일하기가 너무 싫어집니다. 그래도 어떡해요, 책임질 가정이 생긴 지금, 예전처럼 확 그만둘 순 없지요.
오늘도 저는 한숨 푹 쉬며 책상 앞에 앉아서는, 하기 싫은 일들의 덩어리를 싹둑싹둑 자르고 난도질했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해내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번 써 내려가보니 알겠네요. 회사 밖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제 자아를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가 필요한 시점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