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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가족

내 가족을 이루게 되다

by Nancy

남편과 처음 만난 건 2016년 1월 스페인에서였다.


홀로 떠난 두 번째 유럽여행이었다. 그보다 몇 년 전 처음 혼자 유럽여행을 갔을 때는 키 큰 서양인들 틈에서, 삼삼오오 모여 깔깔거리며 여행하는 무리들 틈에서 영어도 유창하지 않고 체구가 조그마한 나는 주눅고 고향이 그리웠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떠나보자 용기를 내어 갔던 두 번째 나 홀로 여행에서는 혼자 여행하는 재미와 낭만을 알게 되었고 오롯이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계획대로 움직이기도 하고 계획이 바뀌더라도 눈치 보거나 의논할 필요 없이 바로 행동에 옮겼다. 그저 정처 없이 거리와 풍경을 즐기며 걷다가 배가 고프면 식당을 찾아가 맥주 한잔에 맛있는 타파스를 먹고, 저녁에는 숙소로 가서 나만의 공간에서 맥주 한 캔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굳이 서로 다른 의견을 절충할 필요도 없었으며 다른 사람의 상황에 맞출 필요도 없는 정말 나만의 시간들.


그런 시간들 속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 이제는 혼자 여행을 계획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이다.


스페인에는 '론다'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누에보 다리가 꽤 볼만한 절경이고, 특히 야경이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이를 여유 있게 즐기기 위해 하루 묵어가기로 결정했던 곳이었다. 누에보 다리를 보러 절벽길을 따라 내려가는 중 몇 걸음 앞에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아, 저 사람도 혼자 왔구나.

여행 중 지나친 여느 사람들처럼 그러겠거니, 혼자 여행 중인 한국 사람이겠거니 하며 걷는 중 그 사람이 잠시 멈춰 사진을 찍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팔을 주욱 내밀어 뒷배경과 함께 셀카를 찍어보는 그에게 나는 물었다.


- 사진 좀 찍어 드릴까요?


그렇게 서로의 사진을 번갈아 찍어준 다음 자연스럽게 함께 걸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려 보여서 학생인 줄 알았던 그는 마침 나와 또래였고, 게다가 직업까지 비슷했다. 그는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즐거운 산책이 끝 나갈 즈음 그는 나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 청했다. 나는 오후 5시가 되어가도록 아침에 먹은 사과 한쪽이 전부였고, 다리만 본 후 바로 저녁을 먹어야지,라고 혼자 생각 중이었으나 그의 제안에 알았다고 했고 자연스럽게 번호를 교환했다. 숙소에 돌아가 밀린 빨래를 간단히 한 다음, 광장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할아버지 셰프가 혼자 운영하시는 레스토랑이었는데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세 가지는 기억이 난다. 코스 중 염소치즈가 나왔는데 이것을 맛본 그의 얼굴이 몹시 일그러져 내가 깔깔거리고 웃었던 것, 레스토랑의 작은 텔레비전에서 슈렉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있었는데 둘의 사이가 어색해 하릴없이 화면만 쳐다보는 나에게 아이같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냐며 귀엽다는 듯 나를 쳐다본 그의 얼굴(사실, 난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 않아서 영화관에서 돈을 내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등의 일은 평생 해본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끝낸 우리에게 서비스라며 와인을 한병 건네셰프 할아버지.


더치페이로 계산한 후, 나 서비스로 받은 와인을 그에게 보하며 숙소에 가서 마시라고 했다. 그는 혼자 이렇게 큰 것을 마실 수가 없다며 같이 마시자고 제안했다.(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와인 한 병 정도는 충분히 다 마시고도 남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숙소가 누에보 다리의 야경을 보기에 아주 좋다며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물었고, 나는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특히 각종 범죄들이 떠오르고 뉴스 화면들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좋은 사람 같아 보이긴 하지만 만난 지 반나절도 안된 이 사람을 믿고 따라가도 되는지, 그것도 머나먼 타국에서. 사실 엄마는 내가 여행을 가기 전 새해를 맞이하여 철학관을 다녀오셨는데, 나에게 남자를 조심해야 한다며 부적도 하나 지갑에 넣어주셨고 절대, 절대로 낯선 남자와는 말도 섞지 말라고 하셨던 참이었다.


엄마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거절을 어려워하는 나의 성격이 나에게 반쪽을 찾아준 것인지, 우리는 그가 묵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와인을 마셨고 내 걱정은 민망하리만큼 건전했다. 숙소 테라스에서 저녁을 먹던 한국인 가족들은 우리에게 먹어보라며 새우와 샐러드도 안주로 나누어 주었다. 아마 그때 초등학생으로 보였던 그 아이들은 지금쯤 고등학생이 되어 있을 듯하다. 만약 우리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던 마음씨 좋은 그 부부가 이 글을 보신다면 우리의 추억에 즐겁고 따뜻한 추억을 한 조각 더해주신 것에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 그때의 우리 역시 와인 한 병 마시는 것쯤은 전혀 어렵지 않았고, 마지막 한 방울을 비운 후에는 입맛을 다시며 타파 집으로 가 한참을 맥주와 샹그리아, 틴토 베라노(와인과 레몬향 탄산음료를 섞은 음료)를 마셔댔다.

한잔의 기준이 300미리쯤. 왜 그리 적은 지. 그렇게 작은 체구의 한국인 남녀 두 명은 추가 주문을 한참 했던 것 같다. 처음의 어색함은 어느새 가시고, 매우 편한 친구처럼 느껴지면서도 약간의 설렘까지 있었다. 타파 집이 문을 닫은 후에도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간 우리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아쉬움을 끝으로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나는 그날 특별히 묵어보고 싶었던 파라도르 호텔에 나름 큰돈을 주고 묵었는데 숙소의 안락함과 분위기는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다. 다음날 기대하던 조식도 숙취와 수면 부족으로 제대로 만끽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아쉬웠던 론다의 일정은 끝이 났고 나는 그라나다로, 그는 세비야로 향했다.


그는 처음부터 혼자 여행 왔던 것은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왔었고, 부모님은 한국으로 먼저 들어가신 후 혼자 남아 여행을 계속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페인에서 시계방향으로, 그는 반시계 방향으로 일정을 소화 중이었고 마침 우리의 코스가 겹치는 단 하루가 그곳 론다에서의 시간이었고, 우리는 만났다. 서로 각자의 여행으로 다시 돌아간 후에도 메시지를 계속 주고받았고 이튿날 그는 내가 있는 바르셀로나로 기차를 타고 8시간을 달려왔다.


그는 이미 부모님과 둘러보았던 구엘공원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나와 함께 가주었고,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저녁엔 오케스트라 공연을 관람했다. 그보다 몇 년 전 혼자서도 왔던 바르셀로나에서 혼자 빠에야와 샹그리아를 먹고 왔다고 하니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언니가 혼자 왜 그리 청승이니,라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언니. 저, 이번엔 청승 떨지 않고 함께 샹그리아를 마셔요.


바르셀로나에서 꿈같은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이제 정말로 헤어져 나는 프랑스의 남부 도시 니스로, 그는 마드리드로 향했다. 우리의 한국 도착일도 같자, 나는 우리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나는 그 당시 외국 항공사의 승무원인 친구 덕에 버디 티켓(남는 좌석에 한해 직원가와 비슷한 가격으로 티켓을 예매할 수 있음)을 활용하였고, 다만 이 버디 티켓은 예약 상황에 따라 일반 고객들의 예약이 꽉 차 있지 않을 때 이용이 가능했다. 원래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날은 예약이 많이 차있다며 하루나 이틀 정도 입국을 앞당겨야 할 것 같다고 친구가 권했고 나의 입국은 예정보다 앞당겨졌다. 그렇게 앞당겨진 입국 날이 마침 그의 입국 날과 같았고 마침 시간대도 비슷했다.


우리는 그렇게 또다시 공항에서 만났다. 반가운 만남도 잠시. 그는 광주로 가야 했고, 나는 부산으로 가야 했다. 아쉬웠던 우리 둘은 공항에서 만나 간단히 저녁을 함께 먹고 헤어졌다. 짧은 기간 동안 먼 타지에서 여러 번의 만남과 헤어짐은 긴 여운을 남겼고 그렇게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막 시작할 무렵 같이 근무 중이던 캐나다인 원어민 교사에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우리가 연애를 시작해도 될지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나의 고민에 Matthew는 4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기 나라에서는 7시간의 거리도 아무 문제없다며, 한국은 아주 작은 나라라고 말해주었고 나는 용기를 냈다.


연애를 시작함과 동시에 나는 근무지역도 옮겼고,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아 입시지도를 하느라 하필 아주 바빠졌다. 거의 매일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하는 나를 위해 그는 매 주말마다 멀리까지 와서 나를 기다려주고 배려해주었다. 원래 감정 기복이 있는 편이라, 누군가를 만나면 불안한 마음이 한 번씩 나를 흔들고, 그것이 나와 상대방의 관계까지 흔들리게 했던 것이 나의 연애였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늘 투명했고, 흔히 밀당이라 말하는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이 나를 안정되게 만들었다. 우리의 대화는 늘 끊임이 없었고 그 대화에는 항상 웃음이 가득했다.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고 재는 것으로써 생기는 오해들은 전혀 없었다.

아, 이 사람과 살면 평행 이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물론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확신은 여러 현실들과 부딪히면서 의심 정도로 강등되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모르겠다.) 그렇게 일 년 정도의 장거리 연애 후 우리는 결혼을 결심했고 다행히 전라도 부모님과 경상도 부모님도 별다른 지역감정 없이 흔쾌히 수락해주셨다. 그는 임용시험에 다시 응시해 내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까지 했고, 장거리 연애와 잠깐의 주말부부 생활은 끝이 났다.


그렇게 혼자 떠난 여행에서, 혼자 떠나는 여행의 참 재미를 알고 평생 이렇게 지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한 여행에서 나는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었고 결국 그것이 마지막 나 홀로 여행이 되었다. 한 번씩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으며(1%의 진심을 담아) 얘기한다.


-아, 할아버지! 왜 저희에게 와인을 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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