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큰 전환점은 있게 마련이다. 나의 전환점은 내 목숨도 아깝지 않을 내 아들을 얻은 일이다. 결혼 초기에는 직장 문제로 주말부부를 하다가 결혼 후 두 달쯤 되던 무렵 남편이 내가 근무하는 지역으로 이동하며 함께 생활할 수 있었고, 마침 그때 아이가 찾아왔다.
남편과 나는 제법 술을 즐기며 살던 사람이라 그 주말 역시 여느 때처럼 남편과 기분 좋게 달달한 돼지갈비와 소주 한잔 기울이며 한 주를 마무리하는 듯했으나. 밤늦게 갑작스레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심한 복통이 찾아왔다. 119를 불러, 급히 응급실에 갔고 피검사에서 임신을 확인했다.
그 당시는 반가움과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움과 걱정이 더 컸던 것 같다. 마침 그 해 겨울에는 남편과 크로아티아 여행을 계획 중이었고 신혼생활을 좀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당황스러운 마음은 열 달 동안 배가 불러오고, 아이와 교감하고, 태동을 느끼면서 설렘과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아들을 낳은 직후 아들의 빨갛고 쭈글쭈글한 얼굴을 보았을 때에는 그때의 내 생각이 참 후회되었고 혹시 아이가 뱃속에서 마냥 환영해주지 못한 내 마음을 느꼈을까 봐 참으로 미안했다.
나는 비장했다. 여러 서적들을 탐독하며 수면교육, 양육방법 등을 공부했고 노트에 요약정리까지 해두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당연하지만, 그 외에도 멋들어지게, 똑순이답게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또 한편 아이를 키우느라 내 인생을 모두 희생하고 장성하여 내 품을 벗어나는 아들에게 서운해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인생을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면서도 행복한 가정에서 행복한 아이의 삶을 다져주고 싶었다.
그런데 점점 이런 모든 설계는 나의 헛된 꿈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의 주변에서, 사회에서 우리 가족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들바라기 엄마, 희생하는 엄마, 엄마 껌딱지 아들의 모습이었다.
조리원에서 퇴소하여 시어머님께서 일주일 정도 조리를 도와주러 와 계셨을 때, 나는 모유수유를 하다 유선염을 앓았다. 그래서 진료차 병원을 다녀왔다. 그때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아이구, 애가 엄마가 없는 걸 아는지 울고 보채더라, 잠도 잘 안자더라.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아이는 그 전과 얼마나 많이 다르고 보채었을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 조그마한 아이를 두고서는 단 한 시간도 외출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나를 옥죄는 듯 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나를 박소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엄마로 본다는 것을 알았다. 시부모님이든 친정부모님이든 통화할 때 주제는 언제나 나의 안위보다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였다.
시어머님은 아이가 칼같이 낮잠을 30분만 자고 일어나서 악을 쓰며 우는 통에 힘들다는 나의 말에, 이렇게 출산휴가도 쓸 수 있고 휴직도 해서 엄마가 아이를 돌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로 답해주셨다.
임신 때부터 줄곧 호르몬의 노예였던 나는 그런 말만 들어도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펑펑 울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되어버린 것 같았고, 변해버린 내 몸과 일상에 적응하느라 하루하루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조그마한 아기는 우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나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는 바라볼 사람이 없었다. 임신 후부터 읽기 시작했던 육아서들도, 정리해놓은 노트도 그때의 나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희망 여부에 관계없이 세상에 아이를 내어놓았다. 조그마한 아이에게 나는 우주였고, 아이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비장한 초보 엄마는 '엄마'라는 단어가 참으로 무겁게 다가왔고 무섭게 다가왔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의 호르몬도 균형을 찾아가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자라나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나에 관한 고찰은 할 시간조차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육아에 몰두했다. 내가 자라며 아쉬웠던 것, 좋았던 것들을 최대한 떠올려보며 우리 아이를 더 잘 키우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깊게 되새겼다.
그러면서 가족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았다면 나의 어린 시절도 내 마음 아주 깊은 곳에 박혀버려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고, 어린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내가 마주 보게 될 날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첫돌을 맞기 전에 나는 복직을 했고 남편은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내가 휴직 중일 때에도 남편은 일찍 퇴근해서 오는 편이라 퇴근시간이 늦거나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남편을 둔 사람들이 겪는, 흔히 독박 육아라고 하는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복직하기 전날 시아버님과 통화를 했다. 출근 준비 잘하고 있냐며 어머님은 옷을 사 입으라고 용돈을 보내주셨고 아버님은 건강을 잘 챙기라고 격려해주셨다. 기분 좋게 통화를 마무리하기 직전, 아버님은 물으셨다.
- 애 먹을 건 다 챙겨놨니?
아,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여. 왜 아이가 먹을 것은 엄마만 준비할 수 있는 겁니까. 함께 낳은 아이가 아니던가요. 지금 아들은 육.아.휴직을 했다구요.
한 번은 시어머님과 통화를 할 때에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 주말에 이유식 만드느라 힘들지?
어머님, 왜 당연히 제가 만들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저는 집에 있는 부자가 먹을 식사를 다 준비해놓고 주말을 마무리해야 하나요? 그런 건 아들에게도 시켜주세요. 너무 슬프게도, 실제로 주말에 나는 한꺼번에 이유식을 만드느라 바빴다. 어머님의 말씀에 그저 호호, 하고 답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