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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되기는 힘들어

남편은 쉽게 아빠가 된 것 같은데

by Nancy

결혼을 통해 오롯이 나만의 가정을 만든 지 두 달만에 임신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가족이 생기게 되었다.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설렘보다는 큰 걱정으로 시작한 태교 생활이었다. 당장 계획해놓은 그 해 겨울 크로아티아 여행은 몇십만 원의 위약금을 물고 항공권과 숙소를 취소했고,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2박 3일간의 수학여행을 앞두고 있어 임신 사실을 알려야 했다. 임산부이지만 야간 자율학습 감독이나 아이들의 담임으로서 학급에 폐를 끼치기 않게 최선을 다할 테니 너무 걱정과 근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 달라는 마음을 담아.

직장을 다니며 태교 생활을 하기란 쉽지는 않았지만 틈틈이 태교에 좋다는 모차르트 음악도 듣고 아이 방을 꾸밀 DIY 명화로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도 그리곤 했다. 고흐가 설레는 마음으로 고갱의 방을 꾸며줄 작품을 그렸던 것처럼 사랑하는 내 아이의 방을 환하게 비춰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노랗고 밝게 빛나는 해바라기 그림을 그렸다.


가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부터였던 것 같다. 내 가족을 꾸리고, 내 아이가 생기니 가족이란 무엇인지, 나는 어떤 가족을 만들어가고 싶은지, 나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묻혀있던 가족에 대한 많은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게 되었다.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 내 아이도 이렇게 살게 해 줘야지, 상처가 되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 내 아이는 이런 일은 겪지 않게 해 줘야지.라고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내 감정과 내 생각을 전해주었다.

다행히 우리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고 감사하게도 크게 아픈 곳 없이 잘 크고 있다. 임신 중이던 시절 나는 최초로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미뤄지게 되었던 해에 진원지인 포항에서 지진을 겪었고, 당시 학교에서 근무 중이다가 깜짝 놀라 운동장으로 동료들과 학생들과 대피를 했었다. 다들 뛰어가는데 나도 모르게 뛰려다가 배를 붙잡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 한가운데로 갔던 기억이 난다. 두어 달 후에는 독감을 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성 당뇨를 판정받았으나 다행히 우리 아이는 건강하게 세상 빛을 보았으며 오히려 그 덕분인지 의외로 대담한 면이 많다. 뱃속에서부터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단련된 덕분이 아닌가 싶다.


아주 추운 겨울, 나는 독감을 앓았다. 독한 약을 쓰지 못해서인지 감기가 계속 떨어지지 않더니 결국 독감까지 걸리고 말았다. 5일간 병가를 낸 나는 한동안 집에 누워만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괜찮다고 했지만 독한 독감약을 먹는 것이 얼마나 아이에게도 미안하고 스스로도 서럽던지. 야속하게도 기침은 멈추지 않았고 며칠을 내내 임산부 독감, 임산부 감기, 임산부 기침, 임산부 타미플루 등과 같은 검색어들을 찾아보며 어떤 임산부가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하다 갈비뼈가 부러진 얘기 등을 읽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남편은 퇴근 후 필요할 때 부르라고 하며 안방의 맞은편 서재로 건너가 컴퓨터 게임을 하였다. 타미플루를 복용해서인지 너무 열이 나서인지 약간의 환청도 있었던 것 같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 안 되는 소리들과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한참을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했다. 그 순간에도 맞은편 방에서 게임을 하며 잘 안 풀리면 소리 지르곤 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도 하루 종일 혼자 자다 깨다를 반복했는데 남편이 퇴근하고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 기간 중 기억나는 것은 남편이 배달 어플로 돈가스를 시켜먹어서 하루 종일 굶었던 나도 옆에서 좀 먹었지만 입안이 깔깔하여 많이는 먹지 못했던 것, 퇴근길에 죽 하나 사 오지 않았던 남편, 종일 집에서 끼니는 어떻게 하는지 한 번을 묻지 않은 남편, 시어머님께서 용돈을 조금 보내주시며 남편에게 재료를 사다가 영양죽을 끓여주라고 하였으나 전화로 알았다고는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남편의 모습 등이다.

그렇게 며칠을 앓고서는 독감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다간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친정에 가서 며칠 지내다 오고 싶으니, 데려다 달라고 했다. 돌아온 대답은 시외버스 터미널로 데려다줄 테니 버스를 타고 가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정말 어렵게 나는 엄마에게 와줄 수 없냐고 전화를 했고, 엄마는 당시 첫째 조카를 돌보느라 매우 바쁘셨다. 좀 난감하다는 듯 말씀은 하셨지만 다음날 집으로 와주셨고 전복죽을 끓여주시고 가셨다. 정말 어렵사리 전화드린건데 고맙기도, 서운하기도 했던 나의 엄마.


임신 중 서운한 것은 평생 간다던가. 정말이다. 임신 중 굶어 죽을 뻔한, 전혀 우습지 않은 에피소드를 남편에게 한 번씩 얘기하곤 했다. 어느 날은 남편 스스로도 부끄러웠던지 이제 그만 얘기해달라고 충분히 미안함을 표현하지 않았냐고 했다. 이제 더 이상 언급하진 않지만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 상처는 남아있다는 것을 남편은 알지 모르겠다. 내가 믿고 사랑하는, 내가 선택한 가족조차 나에게 이따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다.

아마 나 또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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