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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아빠의 육아휴직기

그것은 나의 전쟁

by Nancy

복직 후 하루하루 지나면서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지친 얼굴의 남편이 나를 맞이했고, 나는 서둘러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하루 종일 아이와 있어주지 못한 죄책감이 밀려오기에,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 내어 먹이고 놀아주고 재우면 하루의 일과는 끝이 났다.

다음날은 똑같은 일상의 반복.

주말에는 밀린 청소 등 각종 집안일과 아이의 이유식을 만들기 바빴다. 나는 내가 한 것처럼 이유식도 남편이 직접 만들어 먹이길 희망했지만 남편은 버거워하는 듯했고, 그래도 포기하기 쉽지 않은 비장한 엄마였던 나는 재료를 준비해주기도 하고 퇴근하고 만들어두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임신 중이던 시기, 방학 중 보충수업이 있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남편은 소파에 앉아 '오늘 점심은 뭐야?'하고 물어보곤 했다. 그럼 나는 허겁지겁 칼질을 하고 냄비에 불을 올렸다. 또는 근무 중에 남편에게 문자를 보내 냉동실에 있는 돈까스나 국을 꺼내두라고 하면 남편은 꺼내두었고, 나는 집에 와서 해동된 식품들을 조리하고는 했다. 한결같은 사람.

나도 결국 남편의 한결같은 끈기에 백기를 들었고 이유식 배달 주문을 했다. 이 글을 읽는 엄마들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표 이유식은 그때 나의 욕심이었던 것이지, 사서 먹이든 만들어 먹이든 부모의 사랑은 크고 넓으며, 아이가 잘 먹고 잘 자라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다른 사람의 상황이나 마음을 헤아려줄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하는 일과 남편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비교하며 분노하고는 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힘이 들면 조금 쉬어가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원래 남편이 일 년간 휴직을 하며 아이를 돌보고 두 돌 무렵 남편도 복직을 하면서 어린이집을 보낼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도 종일 집에서 아이와 지내는 것이 힘들었는지, 집에 돌아오면 일그러진 남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도 가슴이 답답하고 힘겨웠고 나는 남편에게 시에서 제공해주는 돌봄 기관을 알려주었다. 미리 예약하면 하루에 4시간 정도 아이를 돌봐주었고, 약간의 자유시간이 생기면 남편도 좀 더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그 후로 남편의 얼굴도 한결 편안해 보였다. 남편은 나에게 배려해줘서 고맙다고 표현했고, 시어머님도 서로 챙겨주며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해주셨다. 사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다투고 우리 가정에 모진 풍파가 불었는지는 모르실 것이다. 얼마 안 가 남편은 돌봄 기관이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시기가 남편과 가장 많이 싸운 한 해였던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폭발했다. 이유식을 사 먹여도, 집안 살림을 안 해도, 다 괜찮은데 아이를 좀 더 잘 돌봐줄 수 없냐고. 아직 말도 못 하는 어린아이기에 부모인 우리가 품어주려고, 그러려고 휴직한 것 아니냐고. 당신 휴직의 목적은 대체 무엇이냐고.

당신은 나만큼 하지 않는지가 나의 가장 큰 질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힘들어도 참는데 당신은 왜 견디지 않은지가 가장 큰 물음이었다. 나는 우리 아이를 위해 조금 힘들어도 견디고, 어떤 것이 아이를 위해 최선일지만 생각하는데 남편은 자신의 편리함만 최선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이해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남편은 나에게 가장 큰 물음을 가졌을 것 같다. 왜 너는 그리 인생을 견디고 사는지.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고. 결국 나는 며칠을 퇴근하고서 어린이집 상담을 몇 군데 다녀보았고 우리 아이는 16개월부터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점심 먹은 후에는 하원 시키기로 했던 남편은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아이가 적응을 잘하니 어린이집에서 낮잠까지 재우고 오후 늦게 하원 시키기로 말을 바꾸면서 우리 부부의 전쟁은 끝날 듯 끝이 나지 않았다.


한 친구가 나에게 대부분의 여성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남편과 완전히 공정하게 일이 분배되지 않는다고 불평을 쏟아낸 적이 있다. 그때 그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많은 엄마들이 기획 노동에 시달린다고 했다.

기획 노동이란 가사, 육아에 있어서 전체적인 계획을 짜고 구체적인 행동이나 일정을 정하는 일을 뜻했다. 예를 들면 언제쯤 아이의 낮잠을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여야 할지, 언제쯤 초기 이유식, 중기 이유식으로 넘어가야 할지, 아이의 기저귀는 무엇이 좋을지, 아이의 학원은 어디가 좋을지, 이번 주 반찬은 무엇으로 할지, 장을 봐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등등. 물론 실행은 남편도 담당하지만 집안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결정과 기획은 아내이자 엄마의 몫이라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 아이를 보는 동안에도 여전히 과중한 기획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지쳐갔다. 그러나 우리 가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히 엄마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해에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본가에 자주 갔던 것 같다. 한두 달에 한번 정도는 가서 일주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동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매우 부러워했다. 자유부인의 날들을 즐기라고 축하한다며 말해주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몸은 편할지언정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나의 남편은 힘든 현실에 나를 버리고 아이를 데리고 떠난 것만 같았고, 나를 뺀 남편과 아이, 그리고 다른 가족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지낼 모습에 소외감이 들고 서글퍼졌다. 한 가족으로서 힘든 시간들도 함께 하며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가족상과 남편의 가족상은 다른 듯했고, 나는 외로워졌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견디며 살았던 것 같다. 기대기 시작했다가 그 누군가가 없어지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지게 될 내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기를 때도 그런 나의 성향은 여전했다. 늘 내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했고, 내가 만든 가족도 내가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기에 그렇지 않은 남편은 무책임하다 생각하며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본가에 데리고 가기 전후로는 그런 나의 불만이 알게 모르게 툭툭 튀어나왔고 나는 괜스레 남편의 사소한 행동에 트집만 잡게 되어 다툼이 되었다. 물론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며 행복하고 함께 웃는 날들도 많았지만, 내 몸과 마음은 날이 갈수록 소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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