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역할들의 굴레
생각해보면 나는 임신한 후부터 늘상 누군가의 눈치를 본 것 같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임산부와 같은 부서에 있어서 피해를 본다고 생각할까 봐 내 몫을 최대한 다하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임신 10주 정도밖에 안된 극 초기라 계획되어 있던 수학여행을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담임교사로서 아이들을 인솔해서 함께 했어야 하지만 장시간 버스를 타고 오랫동안 밖에 있어야 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흔쾌히 다른 선생님께서 대신 가주셨다. 감사인사를 전하러 찾아뵈었을 때도 따뜻하고 다정하게 웃어주시며 괜찮다며, 오랜만에 수학여행을 가려니 설레고 좋다고 하시던 선생님께는 아직도 감사한 마음이다.
그 외에는 주말 자율학습 감독이나 야간 자율학습 감독도 빠지지 않고 다했던 것 같다. 어느 근로기준법에는 임산부의 야간 근무는 제외한다고 되어있다고 하지만, 사회교사로서 부끄럽게도 제대로 나의 권리에 대해 알거나 주장해 볼 시도는 하지 않았다.
연말이 되어 나는 감기가 지독히도 낫지 않았고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하고 퇴근한 다음날 완전히 녹다운되고 말았다. 독감이었다. 타미플루를 처방받아 먹으면서도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지 일주일 내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내 몸과 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 온갖 걱정과 서러움이 눈 뭉치처럼 커지고 커지고 커져서 내 마음속을 굴러다녔다.
그렇게 독감이 낫고 나니 새로운 시련이 찾아왔다. 임신성 당뇨였다. 보통 임신성 당뇨는 임신기간 중 몸무게가 많이 불어나거나 아이의 체중이 평균보다 많이 나가는 등의 징후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고, 아무런 걱정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검사를 받았는데 임당이라는 결과.
아, 하늘이시여.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다행히 매일 혈당 체크를 하고, 식단 조절을 하고 조금의 운동을 하면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우습지만 가장 서글픈 것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임신했을 때라도 마음껏 못 먹는다면 너무 서글픈 것 아닌가.
특히 나는 떡이나 면 종류를 먹고 나면 당이 확연히 높아지는 편이었는데, 하루는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 사 먹고 난 후 혈당 체크를 했더니 지나치게 혈당이 높게 나와 서러움과 공포심으로 사로잡혀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만삭이 된 나는 출근하는 것도 힘들게 느껴졌는데 이상하게 집에서는 혈당이 괜찮다가 출근만 하면 점심시간 혈당이 확 솟구치는 것을 확인했다. 그만큼 우리 생활에서 마음 상태가 중요함을 느꼈다. 몸과 마음이 약해진 나는 매일 아침 출근을 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이렇게 많은 이벤트들이 있었지만 모두 무사히 통과한 후 보물 같은 아이를 얻게 되었다. 2017년에는 평생(아직까지는)의 반려자를 얻었고, 2018년에는 나의 아이를 얻었다. 아이를 낳고서 한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배우자로, 딸로, 며느리로 생활하던 나는 2019년 복직을 했다. 다른 많은 역할들을 벗어던지고 직장으로 복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할이 또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복직한 해에는 참 많이도 싸웠고 많이도 아팠던 것 같다. 워킹맘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결혼 전에는 직장에서도 나름 일 잘하는 꼼꼼한 사람이라는 평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이가 있는 엄마로 복직한 후에는 내 몫을 전처럼 잘할 수 없는 것 같아 속상하고 눈치도 보였다. 아이가 걸음마할 즈음 복직을 했다. 아무래도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이전만큼은 직장생활에 몰두하는 것이 어려웠고, 나 스스로도 위축되어갔다.
나는 20대까지 내 자존감이 꽤나 높은 편이라고 자부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누가 뭐래도 나를 사랑하고 믿고, 내면의 힘이 충만해야 하는데 다시 돌이켜보면 나는 자존감이 낮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존하고 좋은 평을 받으면서 아, 내가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 자신의 내면의 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의해 나를 판단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있는 아줌마가 되어 복직을 했을 때에는 왠지 모르게 나와 같은 부서가 되기 싫어할 것 같은 생각에 점점 위축되었고(아이가 아파서 조퇴, 지각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그러한 일들에 종종 혀를 끌끌 차는 분들이 계신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는 평을 듣기 싫어 부단히도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래도 늘 100%만큼은 채우지 못하는 것 같은 마음이었고, 그래서 속상했다.
웃긴 것은 집에서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마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도 종일 아이와 지낸 남편의 얼굴은 밝지 못했고,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저녁에만 잠깐 놀아주는 엄마인 내 모습에 자책감도 느꼈다. 엄마표 놀이나 자기 주도 이유식 등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다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늘 발바닥에 불이 나게 움직이는 듯한데 여기서도 저기서도 100점이 아닌 나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원더우먼이 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인스타나 블로그를 보면 정말 어쩜 이러나 싶게 완벽한 원더우먼들도 있던데,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처음에는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복직한 해의 학년 말이 되자 점점 지쳐갔고 지독한 감기에 걸려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온몸이 무거워지자 서러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출근해서 바쁘게 일하다 퇴근하고 오면 또 저녁을 차리고 아이와 놀아주고 재우고, 주말에는 밀린 청소며 주방일을 했다. 그동안 내 몸과 마음이 병들어간 것만 같았다.
특히 몸살 기운이 시작되어 푹 자고 싶고 조금만 쉬면 나을 것만 같은 순간에도 남편과 아이의 식사 준비에, 갖은 기획 노동들에 정신없이 지냈다. 도저히 출근할 수 없었던 하루는 병가를 내고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 준비를 하고 있는 남편에게 등원 후 병원에 데려달라고 부탁을 했고, 남편은 건성의 대답과 함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 여보가 세탁기에 기저귀 넣었나?
아, 남의 편이여. 내가 선택한 나의 사람이 이렇게도 나에게 매정할 줄이야. 세탁기에 들어간 기저귀가 그렇게 중요하니. 우선 나는 세탁기에 기저귀를 넣은 적이 없거니와 그런 말을 주고받을 기운조차 없었다. 열심히 살았던 나 자신이 억울하고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두 말 없이 짐을 챙겼고, 병원에 혼자 가겠다며 집을 나섰다. 나는 병원에 가서 각종 영양제와 소염진통제를 넣은 커다란 수액 주삿바늘을 팔뚝에 꽂고 한참을 잤다. 수액을 다 맞은 후에도 몸이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겁기만 했고 입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의사는 쉽게 처방해주지 않았다. 집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약국으로 가 처방받은 약을 사고, 죽과 따뜻한 차를 산 후 집 근처 호텔에 체크인했다. 남편에게는 하루 입원했고 다음날 퇴원해서 가겠다고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좁은 호텔방에 들어가 죽을 먹고 약을 먹은 후 한참을 자고 또 잔 것 같다. 그날만은 엄마로, 배우자로 나에게 달려있던 수많은 역할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조금이나마 기운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전날 먹다 남은 죽을 마저 먹고 약을 먹은 후 체크아웃을 했고, 가족을 만나러 집으로 향했다.
이것이 나의 결혼 후 첫 혼캉스였다. 부모님에게도, 남편에게도, 친구에게도, 아무에게도 말 못 한 서글픈 혼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