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어른아이
복직한 지 일 년쯤이 지났을 때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 같았다. 마침 그때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무료 심리상담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신청하게 되었다.
신청하고도 시간이 맞지 않아 한참을 가지 못하다가 방학을 하고는 갈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오셨냐고 물으실 때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냥 힘들다라고는 생각했는데 무엇 때문에 힘들다고 명확하게 말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학교 생활에서도 고민이 많았지만 우선적으로 상담받고 싶었던 내용은 집에서의 고민거리였다. 세 살 아들이 아빠만 찾는 것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다 해주었건만 이 녀석은 씻거나 잠자리에 들 때는 아빠랑만 하겠다며 고집을 피워댔다.
아들이 아빠 바라기인 경우 효자라며 모두들 축하해준다. 이상하게 나는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아들에게 거절당한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고 심지어 아들이 밉기까지 했다. 나는 이렇게 널 사랑하고 너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데 왜 내 마음을 모르나, 야속하기만 했다. 온종일 아빠와만 놀겠다, 씻겠다, 자겠다 그러다가도 배고프면 먹을 것을 달라며 꼭 나를 찾는 아들이 미웠다. 내가 너 밥 주는 사람이냐. 미우면서도 밉게 여기는 나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지고 부끄럽기도 했다. 아들과 애착관계가 잘못 형성된 것인지 이런 나의 감정이 잘못된 것인지도 혼란스러웠고, 컨설팅이 필요할 것 같았다.
가정에서의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아들과의 관계나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상담 선생님은 아들과의 애착 관계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하셨다. 그 시기에는 흔히 그럴 수 있는 정도로 보인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들이 아빠만 찾으면 몸이 훨씬 편할 텐데 왜 서운한 감정이 드는지를 논해보자고 하시면서 원가족에 대해서 물으셨다. 나는 지금 현재 내 가정에 대한 고민을 물었는데 나와 나의 부모님과의 관계를 물으시다니. 뜬금없이 멍하게 있는 나에게 상담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 원래 결혼을 해도 부부 침대에 다리가 8개라고 하잖아요. 그만큼 원가족이 미치는 영향이 평생에 걸쳐 크답니다.
잠시 후 놀랍게도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않고 있던 여러 장면들이 스쳐갔고 마음 깊은 곳에서 꺼내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늘 아버지는 오빠에게는 정이 많고 나는 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본인은 솔직하고 직설적이라고 하시면서 남에게 상처가 되더라도 거침없는 화법을 구사하는 편이다. 정이 없는 나와 달리 정 많은 오빠에게는 용돈도 늘 많이 주셨던 것 같다. 똑같이 용돈 주세요,라고 말을 해도 오빠의 단 한 번의 요청에는 바로 지갑을 여셨고, 나에게는 지갑을 닫으셨다. 화를 내며 왜 나만 안 주냐고 물었던 적도 있다. 오빠는 장난식으로 안 줘봐도 애교 부리면서 받아가는데, 나는 안 준다고 하면 삐죽거려서 싫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늘 물음표였다.
아버지와는 달리 엄마는 늘 내 편이었다. 우리 공주, 라는 말을 달고 사셨고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도 업고 다닐 정도였다. 우리 동네 피아노 학원 원장님이 10살인 나를 엄마에게 업혀 다니는 유치원생으로 알았을 정도였다. 지금 나는 17kg인 우리 아들을 안아 올리는 것도 힘겨운데 20kg이 넘는 나를 우리 엄마는 어떻게 업고 다니셨을까.
여느 오빠가 그렇듯 오빠도 나를 놀리거나 괴롭히기를 즐겼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울면 아버지와 오빠는 더 즐거워하며 ‘삘삘이’, ‘삘이’라고 놀려대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말려주셨고 나는 엄마의 품에 기대 울곤 했다. 너무나 수치스러운 그 별명은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해본 적 없는 추억 아닌 추억이다. 그렇게 우리 집은 부자 vs 모녀와 같이 대결구도가 형성되는 날들이 많았다. 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유일한 내 편으로 여겨졌고, 그런 엄마에게 기쁨만 안겨주고 싶었다. 아마 내가 엄마에게 착한 딸이 될 수 있었던 건(나만의 생각은 아니겠지) 나를 그토록 사랑으로 대해준 엄마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땐 나도 꽤나 내 편인 엄마에게 집착했던 것 같다. 하루는 피아노 학원을 다녀오는 길에 저 멀리서 오빠와 엄마가 보였다. 장을 보고 오는 듯 둘 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내 감정이지만 둘을 보는 순간 질투와 형언할 수 없는 배신감이 불타 올랐던 것 같다. 나를 빼고 내 편인 엄마와 다른 편인 오빠가 함께 룰루랄라 재밌게 시장을 다녀오다니! 저만치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부르는 오빠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쿵쿵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아마 짐 좀 들어달라고 애타게 불렀겠지만 웬일인지 나는 화가 났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유치한 내 감정이지만 8살의 나는 진지했다. 집에 들어와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 혼이 나면서도 억울했던 것은 선명하게 마음속에 남아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엄마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멀리서 짐을 들고 오는 엄마를 보고도 달려오지 않는 우리 공주라니. 한편으로는 그만큼 사랑해 마지않는 엄마 공주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따뜻하게 보듬어주었다면 나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을 것 같다는 아쉬운 상상도 해본다. 사실, 내가 엄마라도 그 정도의 마음은 헤아리기 힘들 것 같다.
그렇게 원가족에 대한 여러 일화들을 꺼내어 보았고, 상담 선생님은 내가 마치 지금의 남편과 아이를 그 옛날 아버지와 오빠를 보듯 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를 골려주고 킥킥거리며 웃던 그들을 보며 외톨이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친밀감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한 사람인데 나만 남겨진 듯한 느낌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해석해주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해야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힘들어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다. 여러 번의 상담을 거치면서 나에 대해 더 잘 들여다보게 되었고 내 삶이 얼마나 나의 가족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유일한 편인 엄마와의 유대감과 친밀감을 유지하고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한 번씩 엄마가 나의 경계를 넘어 들어와 본인의 감정을 쏟아놓을 때면 그것이 버겁게 느껴지지만 거부하기는 힘들어 더 힘겨웠다. 그동안 가정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상담 선생님은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는 것보다 부모님께 털어놓는 것이 좋을 거라고 덧붙였다. 내가 말을 해도 아버지는 변함이 없으실 텐데요,라고 하자 상담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아버지는 아버지예요. 변하지 않더라도 그냥 마음을 전달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세요. 싸우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냥, 아빠 내가 그때 힘들었어, 서운했어,라고 전달만 하고 내려놓으세요.
그 후로 쉽지는 않지만 덤덤하게 한 번씩 털어놓는 연습을 해본다. 어릴 때 아빠가 이랬잖아,라고.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않겠지만 나 스스로는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상담을 계기로 나를 돌아보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안아줄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지게 되었다. 때로 아빠 바라기인 아이를 얄미워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사이 좋은 부자를 보며 외롭다고 느끼는 일도 줄어들게 되었다. 단 몇 차례의 상담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나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고 나를 다그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 뒤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심리상담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편이다. 심리상담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망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기침을 하거나 콧물이 흐르면 이비인후과를 가서 콧 속과 목 안을 살펴보는 것처럼, 마음이 욱신거린다면 한 번쯤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세요. 그리고 마음 속의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