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지 배즙이 좋아서...

100개의 글쓰기 59

by 김민성

"감기에는 도라지 배즙이 그렇게 좋다네?"


아내는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지고는 읽던 책을 계속 읽는다.

이게 내 입장에서는 절대로 '툭 던진 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회사 앞 추어탕집이 맛있었다.'고 하면 사원 입장에서는 당장 다음 식사는 거기 가서 해야 하나 고민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못 들은 척하며, 진공청소기 돌리고, 걸레 빨아 바닥 닦고, 세탁기에 빨래 넣어 버튼 누르기가 전부다. 최대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아픈 아내를 위해 열심히 집안일하는 시늉을 했다.


"그래. 김매니저. 잘 하고 있구만."


분명 이 타이밍에 칭찬이 아니라, '여기 먼지가 안 닦였다. 제대로 해라!'라며 핀잔해야 하는데. 느닷없는 칭찬이다. 예상을 벗어난 반응이라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미이다.


'카톡~'


뜬금없이 도착한 카톡엔 딱 두 줄이 적혀 있었다.


"도라지, 배, 대추, 생강

월곡시장에서 사 오세요!!"


그야말로 불가역적 명령이다. 말은 '사 오세요'지만 저 뒤에 붙은 느낌표 두 개는 '사 오지 않으면 알지? 재미없을 거야~'라는 상당히 등짝에 땀나는 협박이 담겨 있음을 이제는 안다. 몸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는 법이니 말이다.


핸드폰과 세탁소에 맡길 외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서 집에서 도라지 배즙 내는 방법을 검색해본다. 압력밥솥으로 만들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갑자기 호기심이 돌기 시작했다. 이왕 하는 거 즐거운 마음으로 하자. 어머니들은 자식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밥도 하고 그러셨는데, 아내 위해 이거 하나 못하겠는가? 어차피 아내 낫고 나면 다음은 내가 아플 차례니 지금 잘 해두자고 마음먹었다.


마트도 그렇지만 의외로 시장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싱싱한 수산물과 야채들, 큼직하게 썰어놓은 머릿고기가 담긴 팩, 옛날식 통닭집, 중국과 다른 나라에서 온 건어물들까지 사지 않을 것들도 다 둘러본다. 사지 않을 생각으로 구경하는데 주인분이 '뭐 드릴까요?'하셔서 그냥 웃고 만다. 정작 생강과 배 사러 갔더니 주인아저씨는 TV에 심취해 계신다.


어디선가. "손님!!"이라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화들짝 놀라 날 발견하셨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뭐 드릴까요?"


아저씨의 표정이 머쓱하다. 반대편 가게에서 수다 떨고 계시던 아주머니의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올 것 같다. 아저씨에게 깊은 동질감이 느껴졌다.


"생강 하고 배 좀 주세요. 차 끓이려고요. 아내가 감기가 심하네요. 하하하."


"아. 네. 요새 감기가 징하지요? 하하하."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기로 무언의 합의를 했다. 생강 600g과 배 세 개, 무 하나를 샀다. 카드를 드렸음에도 500원을 깎아주셨다. 그렇다. 이것은 동지의식임이 확실하다.

입구의 약재상에서 대추와 도라지도 사고, 점심에 먹을 김밥과 떡볶이와 순대도 샀다. 완벽하다.



점심을 먹고, 도라지 배즙을 만들었다. 끓는 동안 아내는 잠이 들었다. 아프기는 많이 아픈 모양이다.

시끄럽게 돌아가던 압력밥솥의 불을 끄고, 잠시 놔뒀다가 김을 뺐다.

배와 대추, 무, 생강, 도라지를 건져내고 뭉근하게 우러난 즙을 마호병에 담아 자는 아내 근처에 놔두었다.

아프지 말아라. 아프지 말아라. 이거 먹고 다 나아라...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조금 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김매니저. 잘 했어~ 도라지 배즙이 아주 마음에 들구만!"


"네. 대표님.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계속 부탁하네!"


"응? 뭐? 앞으로도? 저기요! 여보세요?"


"뚜...뚜...뚜..."


입으로 그런 소리 내지 마! 너 듣고 있잖아! 그런 거는 내가 하는 거라고!!

아내가 이상한 쪽으로 점점 강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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