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닮은 홍제천

나는 누구인가

by 글노리

40도를 오르내리던 살인적인 더위는 좀 가셨지만 여전히 더운 8월 말이다. 무더위 속 시원함을 달래기에는 폭포만 한 게 없는데 서울 몇 군데 인공 폭포가 있는 곳을 안다. 우리 아파트 입구에도 작은 폭포가 있지만 해가 저문 저녁 7~8시에만 가동되어 실효성이 없다. 오금공원 벽천폭포는 규모가 귀여운 수준이고 분수가 함께 있어 폭포답지 않다. 용마산 용마폭포는 2단으로 50m나 되어 멋지긴 하지만 가동 시간이 조각조각이라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고민 끝에 서울 명소로 손꼽히는 홍제천으로 향했다.

홍제천은 종로구, 서대문구, 마포구를 지나 한강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이 중 서대문구 부근에 높이 25m나 되는 폭포가 있는데 떨어지는 물줄기가 거침없어 보고만 있어도 속이 시원하다. 인공 폭포인데 홍제천과 잘 어우러져 자연 폭포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폭포 앞에는 모래가 깔려 있고 앉아서 쉴 수 있는 빈백 소파(Bean Bag Sofa), 벤치가 비치되어 있어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아쉬울 게 없는 환경이다. 폭포와 어우러진 나무와 하늘, 그리고 물레방아가 잘 그린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20250830_123923.jpg < 홍제 폭포 >

폭포 맞은편에는 카페가 있는데 주말이라서 그런지 사람들로 붐볐다. 실내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야외 테라스, 루프탑까지 마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폭포를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테이블을 배열해 놓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소문이 꽤 났는지 관광객도 많이 보였다. 카페의 테라스에서 폭포를 촬영하고 있는 내게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하는 외국인도 있었다.

20250830_124234.jpg < 카페 테라스에서 바라본 홍제폭포 >

폭포 옆에는 숲 속 쉼터로 연결되는 징검다리가 있는데 어릴 적 개울가 징검돌이 떠올라 목적지가 쉼터가 아닌데도 괜히 왔다 갔다 건너 보았다. 물 밑을 내려다보니 내 팔뚝만 한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고 그 옆에 오리도 보였다.

20250830_125839.jpg < 징검돌 옆 물고기와 오리 >

폭포를 마주하고 앉아 잠시 물멍을 때리다 홍제천 물길을 따라 가좌역으로 향했다. 홍연2교부터 홍남교, 연가교, 사천교까지 교각 밑으로 이어진 수변로를 걷는데 한강까지 몇 km라고 알려주는 표지판이 간간이 보였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방울도 지금의 나처럼 홍제천을 따라 흐르겠고 그 물길이 곧을지 구부러져 있을지 풀이나 돌로 막혀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한강으로 또 결국은 바다로 흘러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이 흐르는 모양새를 보면 인생을 떠올리게 된다. 천천히 흐르다 방향을 틀고 잠시 고였다 다시 흐르는 모습이 기쁘거나 슬프거나 좋은 일이 생겨도 불행한 일을 당해도 멈추지 못하고 흘러가는 우리네 삶과 닮았기 때문이리라. 비포장 도로처럼 거친 환경에 놓일 때도 있고 잘 닦인 고속도로를 달리듯 편안하게 지나가는 시절도 있다. 큰 나무처럼 의지가 되는 친구도 생기고 알록달록한 꽃처럼 다양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인생은 굽이굽이 흘러간다.

물은 정해진 형태가 없다. 담는 그릇에 따라 흐르는 길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변한다. 사람마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르게 대응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물을 보면 그저 흐르는 듯 하지만 막으면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가기도 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바위를 깎기도 한다. 실패했을 때 용기를 내어 다시 시작하고 힘들 때 좌절하지 않고 견뎌내는 삶과 은근히 같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현재의 상태로 내 인생을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

단순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는지가 아니라 내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태도에서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세상을 대하는 방식,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무언가를 선택하는 이유 속에서 ‘나’라는 고유의 무늬가 새겨진다는 게 맞겠다.

나로 살아간다는 건 남들이 정한 목표에 맞추기 위해 비교하고 눈치를 보는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이미 정해진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매일 조금씩 변하고 성장하면서 새로운 삶을 지속한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인간이 창조주의 피조물이라고 믿든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되어 왔다고 생각하든 인생에서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요소가 차고 넘친다.

나는 한국에 태어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부모님께 낳아줄 것을 청하지도 않았다. 유전자도 혈액형도 못 바꾼다. 나의 지능도 재능도 선택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의 선택권 안에는 고작 ‘오늘 점심에 뭘 먹을까?’, ‘이번 토요일에 무슨 영화를 보면 재미있으려나?’, ‘연말 모임에 어떤 옷을 입고 가지?’ 정도이다.

물론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밤낮으로 일해서 사업에 성공할 수도 있다. 코피 나게 연습해서 이름난 엔터테이너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도 타고난 재능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고 재능이 있고 충분히 애를 썼음에도 사람들이 얘기하는 운 때문인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도 얼마 안 되는 선택의 자유를 착각해 원하는 전부를 내 뜻대로 하려고 욕심을 부릴 때가 있다.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형편에 따라 삶에 떠밀려서 살아내야만 하는 경우가 다반사임에도 내 인생의 주체는 ‘나’이니 내 삶의 모든 요소를 통제할 수 있다고 오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살다 보면 온갖 지혜를 모으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도 안 되는 소위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걸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나는 내 처지나 주어진 환경을 두고 크게 불평하거나 불만을 품은 기억은 없지만 감사한 마음까지 가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은 감사하며 받아들이기로 태도를 바꾸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는 성경 구절도 있다. 이 문구들처럼 최선을 다했다면 내려놓고 맡겨야 자유로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오로지 먹을 음식, 입을 옷, 거처할 집을 마련하기 위해 힘들게 노동만 하며 산다고 생각하면 삶 전체가 고통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반면 인생의 고비마다 마주하게 되는 어려운 순간에도 나만의 문양과 색깔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면 마음이 훨씬 평온해짐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느끼는 행복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는 운이나 하늘에서 정해준 나의 명에 따르는 게 아니라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달린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의 의미나 ‘나’로 살아갈 때의 만족도는 내가 취하는 태도의 변화로부터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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