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사가 어우러진 현충원 한강 나들길

가장 확실한 변화 죽음

by 글노리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가을 추수를 앞두고 아직 덜 익은 상태의 곡식이나 과일을 미리 걷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날이다. 곧잘 비교가 되는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은 연중 최대 명절이라는 점에서는 우리의 추석과 같지만 이미 추수를 끝낸 수확물에 대해 신에게 감사하는 날이라는 측면에서 시점적인 차이가 있다.

추석 당일 외 전날과 다음 날이 휴일로 지정되고 다른 공휴일과 겹치는 경우 대체 휴일까지 쉬게 되면서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외여행 특수라는 기현상도 나타난다. 하지만 조상의 묘소에 가서 절하고 잘 있는지 살펴보는 성묘는 여전히 남아 있는 추석의 풍습이다.

추석을 앞두고 산소 얘기를 하다 보니 옛 선인들의 효심(孝心)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생각났다. 묘역임에도 불구하고 한강과 함께 어우러져 활기 넘치는 경치를 보며 산책할 수 있는 현충원 근처 한강 나들길이다.

나는 사육신공원을 출발점으로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과 효사정(孝思亭)까지를 돌아보았다. 사육신공원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에 도착했는데 1번 출구를 찾느라 잠시 헤맸다. 이곳은 단종 복위에 힘쓰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신하 6명의 묘소가 모셔진 공원이다. 나무가 울창해서 조용하고 초록빛이 한가득이었다.

20250927_124944.jpg < 사육신공원 입구 >

조금 더 걸으면 용양봉저정이 길가에 보인다. 처음엔 이 건물이 용양봉저정공원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공원으로 들어갔는데 약간 다른 위치에 있었다. 길 찾기 앱을 다시 검색해서 제대로 된 목적지 용양봉저정을 찾았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 현륭원에 참배하러 갈 때 쉬던 정자이다. 묘소를 찾을 때마다 노들강에 배다리를 임시로 만들어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잠시 쉴 자리가 필요해서 지었다고 한다. 한강을 끼고 있는 이 행궁은 당연히 경관이 뛰어났다.

20250927_131557.jpg < 용양봉저정 >

다시 1km가 안되게 걷다 보면 세종 때 우의정 노한이 3년간 시묘살이를 한 자리에 지어진 효사정을 만날 수 있다. 한강과 어우러진 서울 경치가 한눈에 보이고 주변에 나무도 많고 강바람도 너무 시원해서 곳곳에 돗자리를 펴고 앉거나 누워서 쉬고 있는 시민들이 많았다.

20250927_133038.jpg < 효사정 안내문 >

충효 정신을 되새기게 해주는 유적지 세 곳을 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엄숙한 마음으로 망자들의 넋을 기리게 되면서 죽음과 연관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몇 년 전 읽은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생각났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철학자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의 저서이다. 모든 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옅은 믿음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어떤 내용이 담긴 책일까 호기심이 생겼다.

저자는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계속 남아있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물리주의 관점에서 죽음을 정의했다. 그는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일 마땅한 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만 존재한다는 일원론을 택했다고 했다.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이원론자를 향해서는 논리적 근거가 없으니 심리적 믿음을 택한 거라고 비판했다. 죽음이 나쁜 핵심적인 단 하나의 이유는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영생은 좋은 것인가에 대해 무한한 삶은 어떤 형태이든 가혹한 형벌이고 모든 좋은 것들은 유한하기 때문에 좋은 거라고 설명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영원한 삶이 저주일 수 있겠다고 공감한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처음에 뱀파이어가 되어 새로운 삶을 얻게 된 걸 감사하지만 신선한 피를 생명의 원천으로 삼아 영원히 어둠 속에서 지금 모습 그대로 죽은 듯이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형편을 괴로워했다. 흡혈로 다른 생명체를 파괴하며 무의미하게 자신의 생명만 연장하는 상황이 내게도 극단의 고통으로 여겨졌다.

이 책은 '나'는 육체, 영혼, 인격 관점에서 동일할 때 '나'로 규정할 수 있으므로 죽고 나면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으니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삶을 가능한 많은 것들로 채워 최대한 많은 축복을 누려야 한다고 설득했다. 또한 삶의 가치는 삶 자체(=그릇)가 아니라 그 속에 채워지는 내용물에 달려있다고 소개했다. 일상적 성취와 진정한 가치를 구분해야 하며 즐거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가치가 행복의 본질이므로 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완성되는 '삶'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제대로 인식하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저자는 죽음의 본질과 삶의 가치에 대하여 다양하고 흥미로운 논리를 전개했지만 책을 읽기 전 내가 예상했던 대로 잘 사는 방법에 관한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독자가 해결해야 할 숙제는 의미 있는 행복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나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몇 차례 경험했다.

친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지만 친할머니는 젖먹이 시절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나를 안고 친가에 다녀오셨다고 한다. 어른들의 슬픔이 어린 내게도 전달되었는지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후 내가 병치레를 심하게 했다고 들었다.

외할아버지는 폐암 진단을 받으셨지만 큰 고통 없이 세상을 뜨셨고 그 병시중을 들던 외할머니는 오래지 않아 위암으로 명을 달리 하셨다.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간간이 들렀는데 오실 때마다 하룻밤만 더 자고 가라고 졸랐던 기억이 있다. 그 할머니를 다시 못 본다니 많이 서운했지만 견딜만했다.

그다음 마주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내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할 겨를도 주지 않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잘 버텨주셔서 심각하게 힘들지는 않았다. 다만 아버지와 어떤 방식으로도 소통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으로 가신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디로 가셨을까? 차원이 다른 곳인가? 내 말을 듣고 말씀도 하시는데 내가 못 알아듣는 건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내려놓으셨는데 행복하신가? 죽음은 한줄기 빛조차 통과할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된 벽처럼 아버지와 나를 완벽하게 갈라놓았다.

나의 조부모님이나 아버지처럼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면 죽은 상태와 다름없을 것이다. 브라질의 신문 칼럼니스트 마샤 메데이로스(Martha Medeiros)가 지은 시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의 시구 중 마지막 구절이 특히 마음에 남는 이유다.

‘우리, 서서히 죽는 죽음을 경계하자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숨을 쉬는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함을 늘 기억하면서

오직 불타는 인내심만이

멋진 행복을 얻게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조금씩 죽음에 가까워지지만 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는 살아 있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의미 없이 숨을 쉬는 행위 자체가 곧 삶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그저 흘러가는 삶에 익숙해져 열정을 거부하기도 하고 변화가 두려워 스스로 시들기도 하며 일상에 굴복해 영혼을 죽이기도 한다. 결국 진짜로 살아낸다는 것은 치열하게 느끼고 흔들리고 선택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기쁨을 누리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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