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해방로 반포수변길

빙하에서 처음 만끽한 자유

by 글노리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한다. 단순히 원하는 바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원한다기보다는 억압이나 부담에서 벗어나 자기 방식대로 삶을 선택하고 싶어 한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직장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건 출근이 싫다기보다는 존중받지 못하고 통제당하는 환경을 피하고 싶은 느낌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말은 감정적으로 가면을 써야 하는 피로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들어서는 순간 시야가 탁 트여 있어서 답답함은 온데간데없고 바다를 볼 때처럼 해방감이 느껴진 길이 있다. 반포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의 1km 남짓되는 ‘반포수변길’이다.

이곳을 도보로 진입하려면 특이하게 지하도로 들어가야 했다. 계단을 통해 내려가니 어느새 공간이동 마술을 부린 듯 반포 한강공원이 짠 하고 나타났다.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의 문을 통과해 다른 세계로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시원한 강바람이 스트레스를 몽땅 데려가고 버드나무나 갈대, 억새 같은 풀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는 듯했다. 여기저기 피어 있는 가을꽃들이 반가이 맞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햇빛이 강하지 않은 흐린 날씨여서 걷기에도 부담이 없었다. 널찍한 길에서는 무엇이든 내 맘대로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20251004_154725.jpg < 반포수변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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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 반포수변길 꽃 > < 우 : 반포수변길 나무 >

얼마 만에 느낀 자유인가 헤아리다 보니 몇 해 전 떠난 아이슬란드 여행이 생각났다.


아이슬란드는 내가 가고 싶어 하던 여행지였다.

이름부터 얼음나라라니 이 세상이 아닌 듯 초현실적인 느낌이 강하다. 아이슬란드는 불과 얼음의 땅이라고 불린다. 화산이 많고 빙하가 넓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영국 다음으로 큰 섬인데 크기가 우리나라(남한)와 비슷하다.

아이슬란드는 지구가 아닌 듯한 모습 때문에 <인터스텔라>, <스타워즈>, <왕좌의 게임>, <배트맨비긴즈>, <툼레이더> 같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SF나 판타지 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영화 <윌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그린란드에 도착한 주인공 윌터가 롱보드를 타고 질주하던 비탈길은 아이슬란드의 93번 국도, 극 중 히말라야와 아프가니스탄도 실제 장소는 아이슬란드의 바트나이외쿠틀 국립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아이슬란드는 경이롭고 낯선 풍광들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어 직접 한번 가보고 싶은 궁금한 지역이었다. 손에 꼽은 구경거리 중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오로라였다.

몇 년 전 이 나라를 방문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언니가 일 때문에 영국 런던에 장기 체류 중이었는데 숙식을 제공해 줄 테니 휴가 때 왕복 비행기표만 갖고 오라는 제안을 했다. 그때가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이었으니 귀가 솔깃했다. 오랫 만에 세 자매가 뭉쳐서 시간을 보낼 계기도 되었다. 영국에 가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거기서 가까운 아이슬란드를 꼭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아이슬란드행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해서 나와 동생만 가기로 했다. 이런 경우 여정을 짜는 건 내 담당이라 3일간의 단기 여행 계획을 세웠다.

나는 여행사 직원이 하는 일에 착수했다.

맨 처음 런던 히드로 공항과 레이캬비크를 왕복하는 비행기를 'Trip.com'에서 예매했다. 목적지 도착 시간이 낮이 되도록 항공편을 골랐다. 야심한 밤에 낯선 곳에 도착하면 호텔까지 이동할 때 마음을 졸이는 게 싫어서였다.

호텔은 검색을 통해 공항과 시내에서 멀지 않으면서 주요 관광지 픽업노선에 포함되어 있는 곳을 택했다. 공항과 호텔 간 이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셔틀버스도 'Reykjavik Excursions'이라는 사이트에서 미리 확보했다.

다음은 이번 여행의 최우선 목적이었던 오로라 관광 준비를 했다. 'Iceland Travel'이라는 회사의 사이트에서 저녁 8시에 출발하는 3~5시간짜리 코스를 선택했다.

같은 회사에서 둘째 날 일정으로 8시간짜리 계획을 세웠다. '골든서클'이라고 부르는 유명 여행지 세 군데, 싱벨리어 국립공원, 게이시르 간헐천, 굴포스 폭포 관광과 추가로 랑요쿨빙하에서 스노모빌을 타는 상품이었다. 앞의 세 곳은 자연을 구경하는 관광이었는데 마지막 빙하 코스는 1시간 동안 스노모빌을 직접 운전하는 체험형 이어서 가장 기대가 되었다.

마지막 날은 따뜻한 온천수 목욕으로 여독을 풀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캬비크에서 1시간도 채 안 걸리는 곳에 위치한 온천 시설 '블루라군'을 별도 웹사이트에서 예약했다.


레이캬비크에 도착한 첫날 호텔 체크인 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오로라 관광이 예정되어 있었다. 사전에 안내받은 대로 출발 30분 전 호텔 내 픽업 장소로 갔다. 모이는 장소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안내 데스크에 문의했더니 오늘 오로라 관광은 날씨가 좋지 않아서 취소되었다고 전했다. 아마 예약 시 남긴 주소로 메일이 와 있을 거라고 했다. 확인해 보니 몇 시간 전에 취소 공지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여름에는 백야 때문에 오로라를 보기 어렵다고 해서 작정하고 겨울에 왔는데 못 본다니 허탈했다.

오로라를 보기 위한 전제 조건은 까다로웠다. 날씨가 맑아야 하고 칠흑같이 어두워야 하고 태양풍도 강해야 한단다. 오로라 관광에는 인내와 행운이 따라야 한다더니 내게는 참고 견딜 시간도 없었고 좋은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관광버스를 타고 '싱벨리어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오전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는데 새벽 3~4시처럼 어두웠다. 아이슬란드는 위도가 높아서 겨울에는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상당히 짧은 지역이다.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캄캄해서 협곡이며 호수며 절벽이 보이질 않았다.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한다는 싱벨리어 교회의 불빛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에는 강, 호수, 폭포, 빙하, 온천, 간헐천, 수영장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물이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폭포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한다. 겨울에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폭포가 '굴포스'이고 아이슬란드어로 ‘황금 폭포’라는 뜻이란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가 밤에 투광 조명을 받아야만 금색으로 빛나듯이 이 폭포도 특정 조건에서만 황금처럼 보이는 건지, 아니면 황금처럼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는 건지 명확하진 않지만 우리도 물보라와 햇빛이 만나 생긴 무지개를 보기는 했다. 겨울이라 꽁꽁 얼어붙은 폭포를 상상했지만 전혀 얼지 않은 상태였고 흰 커튼이 드리워진 것처럼 물살이 낙하하는 모습은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는 장관이었다.

굴포스 폭포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게이시르' 간헐천도 방문했다. 아이슬란드는 지구상에서 지질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라 화산과 간헐천이 많고 대표적인 곳이 게이시르라고 한다. 약 10분 간격으로 최대 30m 높이까지 물기둥이 치솟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잠깐 머무는 동안에도 수증기와 함께 펑펑 폭발음을 내며 물이 분출하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다음은 스노모빌을 타러 '랑요쿨'로 향했다. 랑요쿨은 ‘긴 빙하’라는 뜻인데 아이슬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빙하이고 얼음층의 가장 두꺼운 부위는 두께가 580m나 된다고 한다.

예약 시 안내 사항에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국제면허증까지 발급받았으나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스노모빌을 타기 위해 스키복으로 갈아입고 헬맷까지 썼다. 잠시 운전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앞뒤로 2명씩 앉은 스노모빌 수십 대가 한 그룹으로 묶였고 맨 앞과 뒤에는 안전을 위해 가이드가 따라붙었다.

내가 운전을 하고 뒤에 동생을 태웠다. 30분을 한 방향으로 달리다가 반환점을 돌아 다시 오는 코스였다. 지형지물이 전혀 없으니 길을 알 수가 없었다. 비슷한 속도로 앞 스노모빌을 따라가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속도가 빠르거나 느린 사람은 가이드가 옆에 붙어 속도를 조절하도록 안내했다.

가는 길은 신나게 30분을 달렸는데 돌아올 때쯤 되니 하얀 눈밭에서 앞만 보고 달려서인지 약간 졸린 듯 몽롱해졌다. 정신이 약간 혼미한 상태에서 물 웅덩이를 피하지 못해 살짝 빠졌는데 가이드가 다가오더니 그런 식으로 운전하면 위험하다며 운전자를 교체하라고 했다. 동생은 겁을 냈고 그냥 운전 못한다고 둘러댔더니 조심하라는 주의로 끝났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 한참을 달려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의 눈길 가르기가 끝난 후 우리를 태우느라 수고한 스노모빌과도 사진을 찍었다. 다른 배경 없이 눈밭에서 나 홀로 찍힌 사진은 입은 복장까지 가세하여 우주비행사처럼 보였다.

마지막 여행지는 세계 10대 스파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는 지열 온천 '블루라군'이었다. 온천수가 뿌연 흰색인데 주변의 검은 용암이나 이끼의 색과 대조를 이루었다. 우리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자연경관에 둘러싸여 온천욕을 즐겼다. 물의 온도는 항상 39도씨를 유지한다는데 피부에 닿는 촉감이 매끄러웠고 따뜻해서 한 번 몸을 담그니 나오기 싫었다. 우리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며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모든 순간이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스노모빌 투어였다. 스노우모빌링을 하는 단 한 시간 동안 나는 자유를 만끽했다. 뒷 좌석에 동생이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동생은 빠른 속도 때문에 튕겨져 날아갈 것 같았는데 말도 못 하고 손잡이만 꼭 붙들고 있었다고 한다. 나 혼자만 즐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건물도, 도로도, 표지판도, 신호등도, 가로수도, 행인도 없는 곳이니 오로지 눈과 나만 있는 듯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눈길에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은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보여서 공간 감각도 원근감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사람은 1~2초에 한 가지씩 하루에 7만 가지 생각을 한다는데 이 한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무념무상의 시간이었다. 순수한 집중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져야만 닿을 수 있다는 수행의 이상적인 경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가 이런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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