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으로 누리는 재미
서울에는 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색다른 분위기의 한강공원이 족히 10개는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자전거를 타거나 수상 레저를 즐기거나 생태 학습을 할 생각은 아니어서 산책과 피크닉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뚝섬한강공원을 걷기로 했다.
며칠 째 비가 오락가락해서 외출을 포기하고 있다가 오후에 쨍하고 해가 뜨길래 집을 나섰다.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코리안드림 한강대축제’가 예정되어 있다며 여기저기 출입을 통제했다. 축제는 저녁 7시부터이고 산책로를 막은 건 아니어서 별 문제는 없었다.
뚝섬한강공원에는 편백나무와 소나무가 반겨주는 산책길이 있다. 500m 정도 되는 흙길인데 나무의 연륜이 오래지 않아 울창하지는 않았다.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함유한 나무라고 하더니 숲에 들어서자 기대 이상으로 시원함이 느껴졌다. 장미원을 지나 침엽수 숲으로 가니 두 사람이 겨우 걸을 만한 오솔길이 나왔다. 숲길이 좁은 대신 빼곡히 서있는 나무가 주변의 소음을 줄여줘서 조용하고 아늑했다.
나는 사진 찍기를 즐기는데 이 숲길을 보는 순간 사진 찍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빛 나무와 멀리 보이는 한강 저편 건물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하면 대비가 훌륭할 것 같았다. 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이용하면 감성적인 느낌도 살릴 수 있을 듯싶었다. 가로수길과 탁 트인 한강 뷰 만으로도 다양한 구도를 잡기에 충분했다. 가장 좋은 건 사람이 많지 않고 한적해서 방해받지 않고 인생 숏 찍기에 그만이라는 사실이었다.
숲길을 나와 뚝섬 자벌레(한강이야기전시관) 근처를 돌아다녔다. 나의 최애 만화 영화인 ‘인사이드아웃 2’라고 쓰인 푯말이 눈에 띄길래 가보니 기쁨이, 슬픔이, 불안이 캐릭터를 비롯해 픽사 로고의 구조물이 있었다. 모두 내가 레고로 조립했던 대상들이라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내가 오늘 건진 인생 숏은 서울의 맑은 하늘과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푸릇푸릇한 풀을 밟고 서 있는 PIXAR 로고 사진이다.
사진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Photography’는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카메라 렌즈로 물체에서 나오는 빛을 모아 감광막에 그 형상을 보존하도록 만든 그림이 사진이니 핵심을 찌르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초창기에 회화의 복제 기술 정도로 취급되었는데 차츰 사실성을 기반으로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인간의 시야를 벗어나는 부분도 볼 수 있도록 만들고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재현할 수도 있는 데다 촬영 기법에 따라 피사체가 전달하는 메시지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사진을 찍은 후 현상을 하고 인화지라는 종이에 인쇄까지 마쳐야 촬영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디지털카메라가 출현하면서 아날로그 사진보다 훨씬 선명하고 깨끗한 사진을 얻게 되었고 편집과 복제는 물론 보관까지 편리해졌다.
요즘은 어지간한 성능의 스마트폰만 있으면 기술적인 면에서는 누구나 전문가에 버금가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필름을 장착할 필요도 없고 인화를 위해 사진관에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된다. 당연히 비용이 들 이유도 없다. 집게손가락으로 셔터만 누르면 된다. 내 모습을 찍어 줄 사람도 아쉽지 않다. 셀피 모드로 바꾸면 스스로 촬영이 가능하니까. 조명의 밸런스, 수평과 수직 기울기, 밝기, 노출, 대비, 그림자도 기본 어플 하나면 편집이 가능하다. 심지어는 AI 기능으로 원하지 않는 부분을 삭제할 수도 있다.
사진을 찍어두면 어떤 순간의 표정, 분위기를 기록으로 남겨 간직할 수 있다. 특별한 사건이나 그때의 감정을 가시적으로 붙잡을 수 있는 매체이니 시간을 저장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사진은 사람이든 자연이든 음식이든 곧 사라질 대상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수단이다. 그 영상에 담기는 것은 피사체의 형태가 아니라 이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리라. 어떤 이는 글로, 다른 이는 음악으로 자신을 드러내듯이 사진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같은 대상을 촬영해도 찍는 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이 나는 이유는 그 사람만의 시선과 현상을 보는 고유의 관점이 반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에 취미가 있으니 가끔 전시회를 다니곤 한다.
오래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잡지 <LIFE>의 사진 130여 점을 볼 기회가 있었다. <LIFE>는 세계적인 주간지 <TIME>과 경제지 <FORTUNE>을 발행한 헨리 루스(Henry Luce)가 1936년에 창간한 시사 화보 잡지이다. 한 때는 주간 발행 부수가 천만 부를 넘었으나 경영 악화로 2000년에 폐간되었다. 그때까지 정치, 전쟁, 대중문화 보도 분야에서 1,000만 장의 역사적인 사진을 남겼다.
<LIFE> 사진전은 국내에서 몇 차례 열린 적이 있는데 내가 간 전시회에서는 그동안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부터 평범한 일상까지 광범위하게 보여주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마하트마 간디, 장 폴 사르트르, 존 레넌, 마론 브란도 등 각 분야 20세기 영웅들과 미국의 인종 차별 시위를 진압하는 현장도 볼 수 있었다. 한국과 관련된 사진도 있었는데 6.25 당시 피난민의 흥남 철수 작전과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모습이었다.
<LIFE> 전시회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진작가가 있는데 ‘색채의 마술사’ 또는 ‘컬러 사진의 선구자’로 불리는 에른스트 하스(Ernst Haas)이다.
그는 컬러 사진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흐릿한 초점, 흔들리는 피사체, 불분명한 색채를 사진으로 표현함으로써 마법처럼 신기한 장면을 만드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가 촬영한 투우사는 움직임이 역동적이어서 동영상 같기도 하고 정체불명의 무늬들은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예사롭지 않은 상상력과 색채 감각으로 피사체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조합으로 변형시킨 작가였다.
전시실 입구에 그가 한 말이 쓰여 있었는데 마음에 남아서 적어 두었다.
“사진은 음악과 같다. 어떠한 해석도 없이 스스로 전달한다”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진이 음악과 마찬가지로 소통 수단이어서 내가 좋아했나 보다.
몇 해 전에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사진작가 ‘에릭 요한슨’(Erik Johansson)의 작품전을 다녀온 적이 있다.
전시실에 “셔터를 누르는 순간 모든 게 끝나는 게 아쉬워 상상력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이미지를 채우고 이 세상과 유사하지만 조작되어 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통하는 창문 같은 것을 창조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단순히 피사체를 캡처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상상을 사진으로 구현하는 작가이다. 순간이 아닌 아이디어를 찍는다고 해야 할까? 아이디어 및 기획에 1년, 실제 사진 촬영은 길어야 1주일 남짓, 세부 이미지화 작업에 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기발한 상상력을 자연스럽고 현실적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한 작가의 피나는 노력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지금도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며 독특한 사진 작업을 구경하곤 한다.
음식점에서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나오면 먹기 전에 사진부터 찍는 시대가 되었다.
사진 기술은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는 시절이 왔지만 프레임 안에 담기는 내용은 세상을 바라보는 촬영자의 마음과 시선이다. 잘 찍는 기술보다 무엇을 담고 싶은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나는 사진이 기록하고 싶은 시간, 기억하고 싶은 얼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사진 찍기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재미는 물론 의미까지 찾을 수 있는 바람직한 취미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