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는 내 친구
6월 초, 여름이 겨우 시작되었을 뿐인데 얼음으로 채워진 찬 음료를 마시고 싶은 날이다. 시원하게 내뿜는 분수를 보며 눈이라도 냉수마찰을 할까 싶었는데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커다란 분수가 있는 곳이 떠올랐다. 능동에 위치한 어린이대공원이다.
나는 전철로 한 정거장을 이동해 공원 후문에 닿자마자 손풍기를 아쉬워하며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저가 커피 매장으로 향했다. 더위에 대비할 준비물이라도 챙기듯 냉커피 한 잔을 들고 입구 쪽 분수를 한참 눈에 담은 후 공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 공원은 개원한 지 50년이 넘었으나 지금도 가족 단위로 많은 사람이 찾는 테마 파크이다. 이름 때문에 어린이를 위한 장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른이 즐기기에도 충분하다. 동물원, 식물원, 놀이동산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지만 외곽으로 난 산책로는 인파에 치이지 않고 숲길을 따라 걸을 수 있어 어른의 힐링 공간으로도 안성맞춤이다. 후문 한편에는 각종 운동 기구가 갖추어진 구역이 있는데 표지판에 ‘어르신놀이터’라고 적혀있다.
내게는 초등학교 시절 소풍도 가고 사생 대회에서 그림도 그리고 친구들과 놀이 기구를 타던 추억이 어린 장소이기도 하다. 잔디밭이 넓어서 소풍 때 돗자리 펴고 앉아 엄마가 싸준 김밥 먹기 좋았던 곳이다. 여전히 도시락 먹는 가족이 많이 보인다. 미술대회가 열리면 풍경화를 그린답시고 수채화 물감으로 도화지에 구멍이 나도록 겹겹이 아름드리나무만 색칠한 생각이 난다. 오늘은 나무 사이로 부는 시원한 바람도 느껴지고 연꽃이 핀 아담한 연못도 시야에 들어온다.
놀이동산을 지나가자니 나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꼬마들의 즐거운 비명이 들린다. 친구들과 떼굴떼굴 구르는 다람쥐통 타며 깔깔대던 웃음소리와 청룡열차(=롤러코스터) 타며 무섭다고 지르던 고함이 들리는 듯하다. 어릴 때는 정문과 후문 사이의 거리가 멀어 걸어가면 다리가 아팠는데 지금은 그리 넓게 느껴지지 않는다. 후문부터 시작해 축구장, 동물공연장, 열린 무대, 정문, 서문, 북문, 놀이동산, 다시 후문까지 제대로 한 바퀴를 돌았는데도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머릿속 시계를 어린 시절로 돌려놓았더니 어른이로 살았던 시간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온 지구가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몸살을 앓는 기간이 길어지자 코로나와의 전쟁이 끝나길 기다리기보다는 새로운 일상을 모색해야 하나 고민했던 즈음인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하는 실내 작업과 종교 활동을 넘어 음식점 출입까지 제한되자 나 홀로 취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다니는 회사에 사우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익명 게시판이 있는데 어느 날 레고 관련된 글이 올라왔다. 자판을 누를 때마다 활자 바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캐리지가 좌우로 이동하는 구식 타자기 제품이 나왔고 건반의 해머와 페달이 실제 작동하고 연주가 가능한 피아노도 있다고 했다. 레고로 이런 게 가능하다고? 귀엽고 앙증맞은 미니어처를 워낙 좋아하는데 관상용 기성품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든다니 눈이 번쩍 띄었다.
레고 그룹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설립된 회사이지만 어릴 때 레고를 조립한 기억은 없다. 우리나라에는 1985년 정식 수입 판매를 시작했다고 하니 철부지 시절 레고를 구경하지 못한 게 당연했다. 그러니까 어릴 때도 하지 않은 블록 장난감 놀이를 다 큰 어른이 되어서 처음 하게 된 것이다.
설계도와 블록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데 처음에는 설명서와 동일한 모양의 브릭을 찾는 것도 어려웠고 방향을 잘못 끼워 다시 빼느라 손톱이 부스러지기도 했다. 물론 레고 브릭 분해기가 있지만 사용법을 잘 모르면 조립품 해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츰 익숙해지면서 나는 레고 조립에 푹 빠졌다.
내가 작성한 목록을 보니 3년 동안 170개를 조립했다. 거의 매주 하나 이상씩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자동차가 거의 반을 차지하고 건축물도 적지 않다. 나머지는 카메라, 라디오, 레코드 플레이어 같은 레트로 전자 제품, 우주선과 비행기, 꽃과 장식품이다.
자동차는 스피드 챔피언 시리즈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만드는 손맛도 일품이고 예쁘기도 하고 깔별로 모아 놓으면 장식 효과도 좋고 가격까지 부담스럽지 않아 한마디로 가성비가 좋다. 덩치가 큰 차들은 근사하긴 한데 보관이 난감하고 테크닉 제품은 튼튼하긴 한데 내 눈에 멋져 보이지 않는다. 기대와는 달리 제일 실망스러운 제품은 기차이다. 똑같이 생긴 열차 객실 칸의 반복 조립으로 지루하고 진열해 놓았을 때 돋보이지도 않아서 더 이상은 조립하지 않기로 했다.
완성품이 쌓이기 시작하자 이렇게 질 좋은 장난감을 100년 동안이나 제작하고 있는 이 회사의 역사가 궁금해졌고 조금씩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레고 세트에는 사람 모양의 미니 피겨가 들어 있는데 얼굴은 모든 인종을 아우를 수 있는 노란색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색상이 나왔지만 인종 차별을 하지 않겠다는 초창기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남자아이들은 총, 탱크, 전투기 같은 장난감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은데 레고 제품에는 무기류가 도통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전쟁 관련 제품은 어린이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 제조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 모양 피겨의 머리 위아래로 뚫어 놓은 구멍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아이들이 삼켜도 질식하지 않도록 만든 공기 통로였다. 또한 무엇이든 입에 물거나 빠는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해 입에 넣어도 무해한 플라스틱, 포장박스, 잉크를 사용한단다. 레고사는 수익 극대화에만 몰두하지 않고 아이들의 인성 교육, 안전, 건강까지 염두에 두는 윤리 의식을 갖춘 회사인 것 같았다.
레고의 주재료인 ABS(Acrylonitrile Butadiene Styrene, 석유 플라스틱)가 독성은 없지만 분해에 긴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바이오플라스틱으로 전환하려고 연구 중이라고 한다. 식물 형태의 브릭은 이미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식물성 플라스틱으로 제작한다니 환경 경영을 실천 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시장 독점을 하려고 기업 비밀이라며 공개를 꺼릴 수도 있을 텐데 브릭 사이즈를 공개하여 모조품조차 제대로 만들 수 있도록 블록 장난감의 표준을 제시했다. 경쟁사를 견제하기보다는 규격화를 통해 호환성을 확보함으로써 모두가 윈윈 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생각된다.
마케팅 전략도 나쁘지 않다. 출시 후 일정 기간 내 단종시켜 제품의 가치를 높인다. 어린 시절 레고 경험자들이 계속 고객으로 남도록 하기 위해 어른용 아이템을 출시하거나 고객의 아이디어를 제품화하여 충성도를 높이기도 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딱 한 가지 비싼 가격만 걸림돌이다. 드물게 괜찮은 기업으로 여겨져 주식이라도 보유하고 싶지만 비상장 가족 기업이라 기회가 없는 게 아쉽다. 어쨌든 나는 레고 그룹의 모토와 경영 원칙이 마음에 든다.
세계 각지에 레고랜드라는 테마파크가 운영되고 있는데 레고 본사가 있는 덴마크 빌룬(Billund)을 비롯하여 윈저, 도이칠란트,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뉴욕, 말레이시아, 두바이,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춘천에 있다. 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함께 세계 3대 테마파크로 불리기는 하지만 규모나 인지도 면에서 뒤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마니아로서 레고가 시작된 빌룬에 위치한 레고랜드는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한 번 둘러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