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가득한 장미 터널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때 LETO

by 글노리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되었다. 요즘은 날씨가 변화무쌍해져서 이 표현도 무색하다. 장마도 아닌데 여러 날 비가 오기도 하고 바람이 많이 불어 추위가 느껴질 때도 있지만 신록의 계절임을 과시하듯 여전히 쾌적하고 화창한 날도 있다.

이맘때면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 화단을 비롯해 좁은 골목길에서도 장미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곳곳에서 장미를 주제로 한 축제도 열리는데 장미꽃으로 장식한 터널이 길게 펼쳐지는 산책로가 있다기에 다녀왔다.

장미 터널은 태릉입구역 바로 앞 묵동교로부터 중곡동 부근 장평교까지 5km 넘게 이어지는데 나는 목동교에서 이화교까지 2km 정도를 왕복으로 걸었다. 축제 기간에는 인파에 밀려다닐 게 뻔해 축제가 끝난 후에 갔는데도 화창한 날씨에 힘입어 많은 사람이 지나다녔다.

중랑천 제방을 따라 천만 송이쯤 되는 장미가 독보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장미향이 기대만큼 그득하진 않았다. 야외 공간이어서 향기는 공중으로 사라진 듯 하지만 꽃의 모습은 그저 황홀했다.

< 장미얼음이 담긴 아이스커피 >

돌아오는 길에 더위도 식힐 겸 장미테마길 입구 쪽에 있는 ‘장미카페’에 들렀다. 후덥지근함을 참기 어려워 평소에는 잘 마시지 않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니 메뉴에 있는 ‘장미얼음’이 무엇인지 물어볼 수도 없어 무작정 추가했는데 가게 밖에 피어 있는 장미 못지않게 예뻤다. 장미 한 송이쯤 되는 크기의 커피색 얼음이었는데 덤으로 얻은 시원한 행운이었다.

장미향은 그냥 향긋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섭섭한 특유의 향이 있다. 꿀처럼 은은한 달콤함이 먼저 올라오다가 풀냄새도 좀 나고 비누향도 약간 풍긴다. 향기는 강렬하지 않지만 뜨거운 햇빛 아래 화려한 자태를 뽐내기 때문인지 장미꽃은 사랑과 열정의 상징이 되어왔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생에서 이룬 성과의 크기와 상관없이 장미꽃처럼 화려하고 열정적인 시절은 언제인지 생각해 보니 청춘이 아닐까 싶었다.

< 장미 터널 >


나의 생각은 청춘의 열정, 패기, 방황, 꿈을 담아낸 영화로 이어졌고 자유를 갈망하는 청춘의 열정을 예술적으로 풀어낸 걸작 한 편에서 멈췄다. 영화 <LETO>이다.

'LETO'는 러시아어로 ‘여름’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청춘’을 의미하는 메타포이다. 이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1980년대 적국(미국)의 음악인 ‘Rock’이 금기시되던 소련(러시아)의 레닌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이다. 한국계 러시아인 빅토르 최가 밴드 ‘KINO’로 알려지기 전 멘토 마이크 나우멘코와 함께 겪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그들을 칭송하거나 성공담을 기록한 전기 영화는 아니고 인생의 여름을 지나는 젊은이의 열정과 억압된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청춘의 저항을 보여주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록 공연장에 온 관객은 몸을 흔들거나 뛸 수도 없고 가수는 자신이 부를 노래의 가사까지 검열을 거쳐야만 무대에 설 수 있다. 이런 시절 음악으로 청춘을 빛내고 싶어 한 이들의 삶을 보여준다. 제작 당시 감독이 정치적인 탄압으로 구속되면서 촬영이 중단되어 어렵게 만든 영화라고 한다.

냉전 시대의 어두운 분위기를 전달하려는 의도인지 흑백 영상이 주를 이루었지만 중간중간 주인공이 음악 활동 하는 광경을 컬러 화면으로 보여줌으로써 무게감을 줄였다. 일부 에피소드는 애니메이션으로 꾸민 낙서를 곁들이고 뮤지컬 형식으로 표현하여 경쾌함을 더했다. 청춘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그린 장면 뒤에는 어김없이 ‘이건 없었던 일’이라는 글씨를 보여줬다.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교묘하게 정부 당국의 검열을 피해 간 듯했다.

러시아 특유의 우울함이 스며있는 빅토르 최의 <Summer Will Be Over Soon> 뿐 아니라 Talking Heads의 <Psycho Killer>, Iggy Pop의 <Passenger>, Lou Reed의 <Perfect Day>, T.Rex의 <Broken Hearted Blues>, David Bowie의 <All The Young Dudes> 등 전설이 된 록 스타들의 노래 덕분에 귀도 호강했다. 최고의 영화 음악에 수여한다는 ‘칸 사운드트랙 필름 뮤직 어워드’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 영화는 결과로 나타나는 성공이나 명예보다 우리가 지금 함께 음악을 하는 사실 자체가 소중하다는 메시지가 강렬해서 신선했다. 때로는 방황하며 흔들리기도 하는 청춘이지만 그들의 진심 어린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있어 더욱 돋보였다.


나는 ‘청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연쇄적으로 생각나는 단어가 있다. ‘열정!’

내가 알고 있는 유명인 중 가장 열정적으로 살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프랑수와즈 사강이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는 방탕한 사생활로 악명이 높았지만 데뷔 후 매일 규칙적으로 2000 단어씩 글을 쓰고 1년 6개월마다 책을 발표했으며 인쇄소로 넘어가는 순간까지 원고를 수정한 열정적인 작가였다.

“모르는 것은 쓸 수가 없다. 느끼지 못하는 것도 쓸 수가 없다. 체험하지 않은 일은 쓸 수가 없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며 극단적인 열정으로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경험까지 쌓았다. 한 인터뷰에서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20대 중반에 쓴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주인공이 연인에게 하는 대사를 보면 사강이 온 마음을 다해 열정적인 삶을 추구했음을 엿볼 수 있다.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진정 후회 없이 신나는 인생을 즐겼다”라고 유언했다.

아무나 범접하기 어려운 극한 수준의 열정적인 삶이었다.


이 순간 지구를 밟고 있는 모든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각자 보내고 있는 인생의 계절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적 연령도 차이가 나겠지만 누구의 삶이든지 똑같이 15세는 봄, 30세는 여름, 45세는 가을, 60세는 겨울은 아닐 테니까. 30세에 추운 겨울을 맞이하거나 60세에 에너지 넘치는 여름을 지나는 경우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건너뛰거나 거꾸로 흐르지 않듯이 인생의 계절도 순서대로 옮겨갈 테고 자연 속 만물이 여름에 무성하게 자라듯이 인생의 여름도 도전하며 성장하는 계절이 될 것이다.

나는 생물학적 나이로는 분명히 여름을 지나왔으나 내 인생의 여름이 이미 왔었는지 지금 지나고 있는지 앞으로 다가올지 잘 모르겠다. 다만 글쓰기 인생으로 보자면 10년쯤 전 씨앗을 뿌렸고 요즘은 글쓰기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여름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지금이 인생의 봄이라면 여름에 키울 씨앗을 뿌려야겠고 여름을 거치고 있다면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때이다. 여름을 지나 가을에 있다면 수확한 결실에 감사해야 할 시기이다. 계절마다 특징이 있고 역할이 다를 뿐 절대적으로 좋고 나쁨은 없으니 내가 통과하고 있는 인생의 계절에서도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전 06화하늘길에 펼쳐진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