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
나는 아이들을 예뻐한다. 버킷리스트에 ‘어린이 친구 사귀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라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이 쓴 시 <무엇이 성공인가?>에 보면 성공이란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내 꿈이 이루어지면 나도 성공한 인생이 되는 셈인가?
내가 어린이 친구를 사귀고 싶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수함, 감정을 꾸미거나 숨기지 않는 솔직함, 에너지 넘치는 생기발랄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진심으로 믿는 상상력, 말이 아닌 눈빛으로 통하는 교감 능력을 부러워하는 것 같다. 나의 바람대로 어린이 친구가 생겼을 때 함께 시간을 보내기 좋은 ‘모두의 놀이터’를 알게 되어 다녀왔다.
이곳은 광나루 한강공원에 위치해 있는데 ‘모든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라는 의미가 담긴 장소이다. 도심지 놀이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800평 규모의 대형 놀이터로 설계를 했다고 한다. 특정 연령대나 특정 놀이 시설에 치우친 기존 놀이터의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전문가와 시민 의견을 수렴해 시설물의 배치, 동선 등을 구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족끼리 소풍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과 벤치는 기본이고 모래놀이터, 그물놀이터, 미끄럼틀, 그네까지 있어 아이들의 놀이동산이다. 여러 가지 시설 중 내 눈에 들어온 건 그네였다. 어린 시절 발로 구르던 그네와는 재질이나 모양새가 약간 달랐다. 의자형, 그물형, 안전바 장착형 등 다양했지만 그네에 얽힌 행복한 추억을 소환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태어난 동네 언저리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몇 번 이사만 했을 뿐 이 지역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닌데 5~6살까지 살았던 첫 번째 집과 그 근처는 머릿속에 사진처럼 찍혀 있어 약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혹시 착각을 하는 건 아닌지 어머니께 확인해 보니 내 기억이 맞다고 하신다.
어린 시절의 오래된 기억이 조금씩 흐려지는 것 같아 전체가 사라지기 전에 글로 옮겨 놓고 싶었다.
온 식구가 방 한 칸에서 살았는데 방의 옆문을 열면 아궁이가 달린 부엌이었고 바깥쪽으로 연결된 부엌문을 나가면 손잡이를 상하로 움직여 물을 퍼올리는 펌프가 있었다. 방문 앞 쪽마루에 앉아 신발을 신으면 거기부터는 엄마가 운영하는 약국이었고 왼편으로 얼굴을 돌리면 약을 짓는 자그마한 조제실이 있었다.
약국을 가로질러 집 밖으로 나오면 큰 도로가 있었는데 옆에는 전파상, 양장점, 구멍가게, 중국집이 있었고 길을 건너면 쌀집, 연탄가게, 순댓국집까지 오밀조밀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공중목욕탕이 없어서 한강 다리를 건너 아랫동네까지 목욕하러 원정을 갔는데 겨울이면 돌아올 때 뜨끈한 풀빵을 사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당시 약국은 의약 분업도 안되었고 이른 아침에 시작해 밤 12시쯤 돼서야 문을 닫았다. 야심한 밤이나 새벽에도 누군가 급하게 문을 두드리면 대응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젖먹이 시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분유를 먹으면 즉시 토해서 모유만 먹고 자랐다고 한다. 먹성이 좋던 언니와 달리 비위가 약했던 나는 모유 수유가 불가한 상황이 되면 쫄쫄 굶어야 했기에 어머니는 외출을 거의 못하셨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몸도 약하고 일이 힘에 부쳤지만 아버지도 밤늦게까지 일했기에 육아에 크게 도움을 주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예방 접종을 하거나 빨아 쓰는 기저귀가 한 겨울에 잘 마르지 않으면 난로 연통에 감아 말려 주는 정도의 기여를 하셨다는 게 어머니가 들려주신 아버지의 육아일지다.
한국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 온 국민이 밤낮으로 일하던 시절이고 남자 직원의 육아 휴직은 상상도 못 하던 시대였다. 언니는 주로 외할머니에게 맡겨졌고 나는 우리 집 건너편에 살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자주 봐주셨다고 한다. 그 집 식구처럼 밥도 같이 먹고 이 방 저 방을 넘어 다니며 또래 남자아이와 어울려 놀던 생각이 어렴풋이 난다.
어린이 집이나 유아원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들었던 어머니는 사정을 해서 만 3살 반, 즉 5살이 된 언니를 유치원에 보냈다고 한다. 7살짜리 동네 아이들이 고맙게도 언니의 손을 잡고 잘 데리고 다녀줬다고 한다. 6살까지 2년 동안 같은 유치원에 다녔던 언니는 3년째 보내려고 하자 재미없다며 학교에 가겠다고 떼를 썼단다. 결국 언니는 7살부터 초등학교를 다녔고 어머니의 걱정과 달리 잘 적응했다고 한다.
동생까지 아이 셋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나도 6살에 유치원에 입학시켰는데 나는 6개월 만에 중퇴를 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안 가겠다고 버텼다는데 그 사실 자체가 기억에 없고 왜 가기 싫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편하게 내 맘대로 놀다가 꼼짝 못 하고 뭔가를 해야 하는 몇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던 게 아닐까 추측만 해본다.
유치원 수업은 중도 하차할 만큼 내게 흥미가 없었는지 선생님을 따라 노래를 부르고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구불구불 곡선을 그렸던 장면 정도만 생각난다. 노래 한 소절이나 옆 자리 친구는 기억날 만도 한데 멜로디도 가사도 친구 얼굴도 온데간데없이 유치원에서 보낸 6개월의 시간은 내 머릿속에서 대부분 지워졌다.
감쪽같이 사라진 추억도 있지만 여전히 잘 보관 중인 행복한 기억도 있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열심히 일한 덕분에 같은 동네에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단칸방에 살다 방이 3개나 있고 실내에서 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부엌도 생겼다. 밤에도 갈 수 있는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욕실에는 욕조가 있어 목욕탕에 갈 필요도 없게 되었다. 이전 집의 쪽마루와는 비교가 안되게 널찍한 거실의 소파에서 뒹굴며 놀 수도 있었다.
앞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흰색과 보라색 라일락 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다. 담장에는 빨간 덩굴장미와 그 아래 탐스런 수국도 있었다. 뒤뜰에는 장독대와 잡동사니 보관용 창고가 있었는데 이곳은 나와 동생의 아지트가 되었다. 30평 남짓의 아담한 단층집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있지만 정작 2층은 없었는데 예산 부족으로 이층 집은 나중을 기약해야 했다는 게 아버지가 말씀하신 사연이다.
새 집으로 이사 간 첫날 안방을 구경했는데 어린 나에게는 운동장만큼 넓어 보였다. 가구를 들여놓기 전의 빈 방이니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이게 우리 집이냐고 들뜬 마음으로 부모님께 다시 확인했던 게 생각난다. 니스가 여러 번 칠해진 종이 장판은 반들반들 윤이 났다. 제법 미끄러웠던 방바닥에서 양말을 신은 채 얼음을 지치듯 미끄럼을 탔다.
이사를 한 후 나는 친구들과 근처 초등학교에 놀러 가곤 했다.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 내 설치된 놀이터 시설은 없었으니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넓은 장소는 학교 운동장뿐이었다. 그곳에는 철봉, 그네, 구름다리, 미끄럼틀, 시소, 정글짐이 있었다. 철봉은 키가 작아 오르기 힘들었고 구름다리나 정글짐은 팔에 힘이 빠져 떨어지면 다칠까 봐 무서웠다. 미끄럼틀은 내려오는 과정이 순식간이라 싱거웠고 시소는 올라갈 땐 기분이 들떴지만 쿵쿵 내려올 때마다 엉덩이가 아팠다.
그네는 앉아서 흔들흔들해 보니 꽤 재밌었다. 차츰 용기가 생기자 서서 타기 시작했고 친구랑 둘이 한 명은 앉고 한 명은 서서 탔던 장면도 기억난다. 그네를 탈 때는 발을 구르는 요령에 따라 앞뒤로 올라가는 높이와 속도 조절이 가능했다. 힘차게 굴러 높이 올라가면 바람이 상쾌했고 새가 되어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내려올 때는 땅으로 곤두박질 칠 것처럼 스릴까지 느껴졌다. 그네는 내게 재미와 자유를 만끽하게 해주는 행복한 놀이기구였다.
나의 유년 시절 기억은 대개 전체가 아니라 어떤 사건의 특정 장면만 스틸 컷 사진처럼 떠오르는데 유일하게 영화 필름처럼 지나가는 동영상이 하나 있다. 요즘 유행하는 숏폼같이 짧지만 강렬하다.
유치원 정원으로 여겨지는 곳에 어머니와 내가 함께 있는데 나는 있는 힘껏 발을 굴러 거의 90도 각도로 앞으로 갔다 뒤로 물러났다를 반복하며 신나게 그네를 타고 어머니는 그걸 지켜보고 계셨다. 어머니는 실컷 그네를 타고 내려온 나를 업어 주셨고 어디선가 따온 앵두를 내게 건네셨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 등의 편안함을 느끼며 앵두를 입에 물고 한알 씩 톡톡 터트렸다. 그네 탈 때 불었던 시원한 바람,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 새콤 달콤한 앵두의 맛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이 장면이 꿈인지 실제 있던 일인지 뚜렷하지 않지만 내가 유치원을 그만둔 날 어머니가 하원하는 나를 데리러 오셨을 때의 일이라는 게 나의 기억이다. 내게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