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안경이 들려준 이야기
나는 그림 그리기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다. 학교에서도 미술 실기는 낙제만 면했을 뿐 90점 이상의 높은 점수를 받은 적이 없다. 그리는 작업 자체가 즐겁지 않고 잘 그리지 못하니 늘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무엇보다 스케치북, 물감, 팔레트, 붓, 물통 같은 준비물 챙기는 게 번거로워서 더 싫었다.
얼마 전 나 같이 재주 없는 사람도 디지털 도구로 그리기가 가능하다는 뉴스를 접하고 유튜브 영상으로 배운 후 캐리커처를 그려본 적은 있다. 어쨌든 그림과 관련된 활동은 놓치면 아쉬울 것 같은 세계적인 화가의 전시회를 가는 정도가 전부이다. 그리기에는 취미가 없어도 그림 관람은 가끔 하는데 조선 후기 산수화를 감상하듯 거닐 수 있는 거리가 종로에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진경산수화길'인데 한국의 독자적인 진경산수화풍을 창안한 정선이 그림으로 그렸던 장소의 역사를 알아갈 수 있는 길이다. 한양 토박이였던 정선은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의 명소들을 ‘인왕제색’, ‘창의문’, ‘백운동’, ‘한양전경’, ‘세검정’ 등의 그림에 담았다고 한다. 이 터는 조선시대부터 많은 예술가를 배출했는데 정철, 윤동주 같은 시인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경복궁역에서 출발해서 윤동주 문학관을 가장 먼저 찾았다. 인왕산 자락에 방치되었던 물탱크를 개조해 만든 곳이라고 한다. 3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는데 제1전시실에는 시인의 일생을 연대순으로 배치한 사진과 친필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은 ‘열린 우물’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데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우물을 주제로 하였고 물탱크의 상단을 개방하여 하늘이 보이는 마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탱크에 어렴풋이 보이는 물의 흔적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제3전시실은 시인이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의 감방과 유사하게 꾸며 놓아서 어둡고 차가운 느낌에 맞게 ‘닫힌 우물’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문학관을 나오면서 방문 기념으로 ‘별 헤는 밤’이라는 시가 적힌 엽서에 문학관 전경 스탬프를 찍어서 갖고 나왔다. 위치 맞추기가 쉽지 않아 도장이 약간 빗나갔다.
조금 더 가니 청운문학도서관이 나왔다. 최초의 한옥으로 된 공공 도서관이라고 하는데 전통 방식으로 가마에서 구운 수제 기와를 사용했고 돈의문 지역에서 철거한 기와 3천 장을 재 활용한 의미 있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우거진 나무와 작은 폭포, 그 옆 한옥이 어우러져서 정말 멋스러운 풍경이다. 청운 공원 산책로를 따라 조용하고 아늑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독서하기에도 적합해 보였다. 청운동(淸雲洞)은 ‘맑은 구름이 걸린 동네’라는 이름처럼 지대가 높았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내려오는 길 가에 주택이 많이 보였는데 이곳에 사는 분들은 어찌 다닐까 싶을 정도로 비탈의 경사가 심했다.
언덕을 내려와 계속 걸으면 청운 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이 근처가 송강 정철의 집터이다. 정철은 잘 알려져 있듯이 시인가 산문인가 싶은 조선 시대 가사(歌辭) 문학의 대가로 많은 걸작을 남겼다. 정철의 가사는 이전의 한문투를 벗어나 우리말을 운율에 맞게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완성도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초등학교 옆 도로변에 그의 대표작인 <관동별곡>, <사미인곡>, <성산별곡> 등이 새겨진 시비가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이를 찬찬히 읽어보는 것도 색다른 맛이다.
옛것의 흔적이 엿보이는 구불구불한 샛길을 걷다 보니 어머니 댁에 남아 있던 아버지의 흔적, 오래된 안경이 떠올랐다.
우리 집 근처에 살고 계시는 어머니 댁에 다니러 갔다가 아버지의 돋보기안경을 보게 되었다. 정말 오래된 물건인데 그걸 보관하고 계신 줄은 몰랐다. 그 안경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아버지는 육 남매 중 막내로 형, 누나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늦둥이셨다. 할머니가 절에 다니며 빌고 빌어서 낳은 자식이었다고 들었다. 섬마을이라 초등학교부터 육지로 유학을 가야 했기에 9살 때부터 혼자 자취를 했다고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뻘 되는 형님이 농고 진학을 권했지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고 싶은 마음에 고향에서 가까운 대전에서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셨단다. 공부는 잘하셨는지 의대를 희망했는데 가난한 농가의 아들이라 학비는 고사하고 대입 지원에 필요한 몇 푼 안 되는 돈도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 고모님의 도움으로 겨우 약대에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졸업도 하셨다.
아버지는 새로 시작한 화장품 회사를 직장으로 택했고 그때부터 승승장구했다. 그 회사는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몇 개 안 되는 화장품 회사 중 하나가 되었고 아버지는 초고속 승진을 하셨다. 기술 개발 부문에서 일을 했고 일본어가 유창한 편이라 일본 회사와의 기술 교류를 위한 출장도 빈번하게 다니셨다. 출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 시절 한국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과자, 장난감, 옷, 시계, 워크맨을 사다 주셨고 난 언제나 이 선물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주경야독으로 약학 분야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자필 서명이 담긴 두 편의 학위 논문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 회사를 나온 후에도 제약 회사의 전문 경영인으로 일하셨고 은퇴할 나이가 되자 직접 약국을 운영하셨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항상 밤늦게 퇴근을 했지만 간간이 놀아 주기도 하셨다. 두 손을 마주 잡고 아버지 발등에 양발을 얹고는 ‘하나 둘, 하나 둘’ 하면서 함께 안방을 걸었던 생각이 난다. 나와의 걷기가 끝나면 동생이 ‘나두 나두’를 외쳤고 그 요청에도 흔쾌히 응해 주셨다. 때로는 누워서 우리 배를 발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고 다리를 폈다 굽혔다 해주셨는데 놀이 기구를 타는 것처럼 즐거웠다.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시지는 못했지만 다 클 때까지 매년 허바허바사장이라는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었고 외식으로 샤부샤부를 자주 사주셨다.
내가 기억하는 중년의 아버지는 새벽에 운동을 하고 아침에 영어 공부를 하고 틈틈이 약학 전문 잡지를 읽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분이었다. 그 시대 어른 대부분이 자신이 겪은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어서 독하게 배우고 죽을힘을 다해 일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젊어서 너무 치열하게 살아서인지 중년부터 지병을 앓았다. 식단과 약으로 조절하는 정도였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졌다. 병원 검사 결과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소견을 듣고 퇴원을 한 후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한 달도 채 안 되었을 때 의사가 가족을 불렀다. 뇌사 상태이고 약물로 혈액을 순환시켜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데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사후 모습도 안 좋을 수 있으니 약물 투여 중단 여부를 결정하라고 했다. 가족들이 전혀 희망이 없음을 알고도 포기 여부를 망설이고 있는데 이를 아셨는지 아버지는 약물 중단을 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의사가 써준 사망진단서에 기재된 사인은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뇌간 마비였다.
아버지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는 아니었지만 사회 통념상 비교적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시골 깡촌에서 무일푼 맨손으로 시작해서 공부도 할 만큼 했고 일하는 분야에서 전문성도 인정받았고 본인 소유의 회사는 아니지만 최고 경영진까지 올랐다.
누구나 시기는 다르더라도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내게 아버지의 인생을 요약하라고 하면 이렇게 간추릴 수 있을 것 같다. 어릴 적 경제적 풍요를 누리진 못했지만 중장년 시절에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화려하게 보냈고 노년에 들어서면서 천천히 내려올 기회를 얻지 못하고 정점을 지나자마자 정리할 겨를도 없이 바로 생을 마감했다.
비참한 노후를 보내거나 긴 병치레로 고생하시지 않은 건 너무 다행이지만 지금도 안타깝고 안쓰러운 건 아버지가 여유롭게 즐기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글을 열 번 넘게 고쳐 썼는데 그때마다 눈물이 났다.
아빠, 편히 잘 쉬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