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얼굴들
겨울 추위가 완전히 물러가기 전인 3월 중순 친구들과 약속이 잡혔다. 모임 장소는 남산. 물론 산 꼭대기에서 만나는 건 아니었고 산을 오르는 게 목적도 아니었다. 남산공원에서 가볍게 산책 후 점심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쌀쌀한 날씨 덕분에 우리는 모두 얇은 패딩이나 바람막이 점퍼를 입었고 나는 목도리까지 준비했다.
남산은 해발 262m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서울 중심에 우뚝 솟아 있다. 남산공원은 서울에서 제일 큰 공원이고 남측, 북측 2개의 순환로로 구분되어 있다. 서울 한복판을 전망하기 좋은 산책길도 있고 흙을 밟을 수 있는 성곽길도 있다. 나무 계단으로 이어진 부분도 있고 우레탄이 깔려 있어 유모차나 휠체어 이용자가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는 구간도 있다. 무서울 정도로 경사진 비탈길도 있지만 미끄럼 방지 처리를 해놓아서 걷기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산책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소나무 군락지가 있고 나무로 만든 의자나 침상이 비치되어 있어 도심지 숲 한가운데 누워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다.
내게 남산 하면 떠오르는 대상은 소나무이다. 어릴 때 4절까지 달달 외우고 쓰기 시험까지 치렀던 애국가의 2절 가사 첫 구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남산에 저절로 나서 자란 소나무만 3만 그루가 된다고 하니 ‘남산’이라는 지명에서 소나무를 연상하는 게 그리 잘못된 현상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연락이 뜸하던 대학 동창들과 다시 만나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보고 온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한다.
나는 안면이 있는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서 복잡하게 관계를 형성하는 성향은 아니라서 빈번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가 많지는 않다.
코흘리개 시절 같이 놀던 친구가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거나 이민을 가게 되어 연락이 끊긴 적도 있고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서로 다른 곳으로 배정받으면서 소원해진 경우도 있다. 학창 시절에는 친하게 지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사고방식이나 추구하는 바가 사뭇 다르다고 느끼면서 서서히 멀어진 친구도 있다. 대학 시절 서클 활동이나 여행을 함께 즐기던 친구들도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게 되자 경조사 때나 얼굴을 보면 다행이었다.
그러던 중 대학 동창 몇 명이 모임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여에 필요한 특별한 조건이나 제한은 없고 같은 학과 출신의 동기 동창이면 된다고 했다. 창립 멤버는 2명인데 안부차 가끔 저녁에 만나면 술이나 마시기 십상이니 주말 아침에 만나 걷기를 하고 점심 식사 후 헤어지는 게 어떻겠냐는 식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모임의 구성원이 8명이 되었다.
두 달에 한 번 주말 하루 오전 시간만 할애하면 되는데도 그날그날 사정이 생겨 참석하지 못하는 친구가 생기곤 한다. 나는 뒤늦게 동참하게 되었는데 부득이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기본적으로 걷기를 하니 건강에 좋고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니 대하기도 스스럼없다. 걸으며 사는 얘기도 나누고 쓸데없는 수다도 떨고 걷기 후에는 맛난 점심도 먹게 되니 업무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진정되는 느낌이다.
미리 장소를 선정하고 주변 맛집 정보도 알아 놓은 후 길 안내까지 기꺼이 맡아주는 친구, 음식과 음료 주문을 포함해 귀찮은 비용 처리를 군말 없이 해주는 친구, 먼 길 갈 때면 걷기 장소 입구까지 뚜벅이들을 차로 실어 나르는 친구까지 있으니 사람들이 알면 부러워할 모임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 모임에서 남산공원을 방문한 날이었다. 우리는 큰 글씨로 ‘남산공원’이라고 쓰여 있는 푯말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은 후 걷기를 시작했다.
걷다 보니 지붕이 둥근 반원형으로 생긴 흰색 건물이 나타났다. 예전에는 어린이회관으로 사용했는데 이후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서울교육연구정보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건물의 독특한 반구형 덮개는 내 뇌리에 뚜렷하게 박혀 있다. 유아기 시절 이 빌딩에 왜 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희미하지만 이를 배경으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아직도 갖고 있어서 내겐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의 추억을 되새기듯 건물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좀 더 걷다가 서울의 랜드마크인 N서울타워도 만났다. 남산 정상에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있어 서울 어디서든 보이는데 TV와 라디오 방송을 송출하기 위해 세운 국내 최초의 전파탑으로 알고 있다. 예전에는 ‘남산타워’라고 불렀는데 ‘Namsan’과 ‘New’를 상징하는 글자 ‘N’을 합성해 30년 만에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이 타워는 높이가 남산과 비슷해서 전망대 길이까지 합하면 거의 400m 상공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셈이 된다. 시내 주요 빌딩, 촘촘히 들어선 아파트, 낮고 아담한 인왕산, 웅장하고 수려한 북한산,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을 포함해 서울 풍경을 360도 회전하며 구경할 수 있다. 저녁이라면 아름다운 석양과 함께 화려한 야경까지 볼 수 있을 텐데 방문한 시간이 오전이라 그런 복까지 누리지는 못했다.
타워 입구에는 사랑의 자물쇠 전망대가 있다.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다녀갔는지 자물쇠를 걸 공간이 부족해서 자물쇠로 장식한 트리까지 밖에 세워 놓았다. 알록달록 매달아 놓은 자물쇠에는 연인들의 이름과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메시지가 가득 적혀 있었다.
공원을 내려오는 길에 보니 복장은 물론 장비까지 제대로 갖추고 사이클을 타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처럼 걷는 이도 많았는데 그 안에 섞여 있던 우리는 순환로만 산책했다. 소나무 숲길 쪽으로는 깊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스치듯 보기만 했다. 소나무가 여기까지 와서 솔향도 제대로 맡지 않고 발걸음을 돌리는 우리에게 눈치를 주는 듯했다.
서울 어디서나 오가며 바라볼 수 있는 남산은 외국 관광객이나 구경차 가는 곳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두 발로 직접 걸어보니 진가를 알 수 있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건 역시 천지차이였다.
남산은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 있지만 차량을 통제해서 자동차 소음을 줄이고 보행자 전용 도로를 만들어 온전히 자연과 마주한 상태로 숨 쉴 틈을 주는 귀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곳에 있기에 평소에는 보기 힘든 도시의 큰 그림을 보며 마음도 환기시킬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치도록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는 법을 잊지 않도록 해주는 곳이었다.
남산 공원 걷기는 오늘 끝이 났지만 시간을 건너 다시 만난 얼굴들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