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트론이 죽던 날

챕터8

by 송영광

1968년, 도쿄. 소니 본사의 연구실에서 한 대의 텔레비전이 처음으로 불을 켰다. 트리니트론. 브라운관 TV의 완성형이었다.


기존 브라운관은 빨강, 초록, 파랑 — 세 개의 전자총이 각각 화면을 쏘았다. 색이 흐릿했고, 선명도에 한계가 있었다. 트리니트론은 전자총을 하나로 합쳤다. 하나의 총에서 세 색을 동시에 제어했다. 색이 선명해졌고, 화면이 밝아졌고, 경쟁사들이 따라 하려 했지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30년간 축적된 노하우. 유리관의 곡률을 0.01밀리미터 단위로 제어하는 기술. 형광체의 배합. 전자빔의 각도. 수만 번의 시행착오 끝에 체득한 장인의 감각이 그 안에 녹아 있었다.


1994년까지 트리니트론은 1억 대가 팔렸다. 출시 25년 만의 숫자였다. 그런데 그 뒤가 더 놀랍다. DVD가 등장하고 고해상도 수요가 폭발하면서, 이후 10여 년간 1억 8천만 대가 추가로 쏟아졌다. 총 2억 8천만 대. 최전성기에는 매년 2,000만 대가 공장에서 나왔다.


"TV = 소니"였던 시대. 삼성도, LG도, 열심히 쫓았지만 감히 그 벽을 넘지 못했다.


삼성 무선사업부에서 휴대폰을 개발하던 시절, 나는 소니의 제품을 분해해본 적이 있다. 뚜껑을 열면 감탄이 나왔다. 부품 배치의 정밀함. 납땜 하나의 깔끔함. 기판 위의 배선이 마치 설계도를 인쇄해 놓은 것처럼 깨끗했다. 설계 자체가 예술이었다.


선배가 말했다.



"이건 도면만 봐서는 안 돼. 손끝에 삼십 년이 들어 있는 거야."



소니의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을 압축해서 넘어갈 방법은 없었다. 적어도, 같은 게임을 하는 한은.


교육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대치동 학원가의 베테랑 강사들에게는 30년의 노하우가 있다. 어떤 유형이 출제되는지, 오답 함정이 어디에 놓이는지, 시험 3주 전에 무엇을 복습해야 하는지. 그 감각은 신입 강사가 도면(커리큘럼)만 봐서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끝에 30년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매월 수백만 원을 내고 그 시간을 산다. 소니의 트리니트론을 사는 것과 같은 논리다. 최고의 기술에는 최고의 값을 치른다.


그런데 게임이 바뀌었다.


2000년대 초반, TV의 패러다임이 브라운관에서 평판 디스플레이로 넘어갔다. PDP와 LCD. 브라운관은 진공 유리관 안에서 전자빔을 쏘는 아날로그 기술이었다. 무겁고, 두껍고, 화면이 클수록 거대해졌다. 32인치 트리니트론의 무게는 60킬로그램이 넘었다. 평판은 얇은 유리판 위에 디지털 신호로 화소 하나하나를 제어하는 기술이었다.


완전히 다른 물리학, 완전히 다른 제조 공정, 완전히 다른 게임. 축구를 30년간 해온 팀에게 갑자기 농구를 시킨 것과 비슷했다. 발재간은 쓸모가 없어졌다. 손재간이 필요해졌다. 경기장의 크기도, 규칙도, 점수를 매기는 방식도 달라졌다.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노하우가 곧 권력이었다. 일본어에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라는 말이 있다. 물건 만들기. 단순한 제조가 아니라, 장인 정신과 세밀함과 시간의 축적을 뜻한다. 소니는 모노즈쿠리의 정점이었다. 브라운관의 유리를 깎고, 형광체를 배합하고, 전자빔의 각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수만 번의 실패가 쌓였다. 그 실패 하나하나가 매뉴얼에 적히지 않는 감각이 되었다.


삼성이 같은 설계도를 가져다 해도 같은 품질이 나오지 않았다. 설계도에 없는 것이 제품에 들어 있었으니까.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체득한 감각. 그것은 매뉴얼로 전달할 수 없고, 시간으로만 축적되는 것이었다. 소니의 30년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세계에서는 규칙이 달라졌다. 디지털에서는 노하우의 차이가 거의 없어진다. 반도체 칩이 연산을 처리하는 방식은 소니가 하든 삼성이 하든 물리법칙이 같다. 질적인 차이는 미미해졌고, 차이를 만드는 것은 스피드와 혁신적인 생각, 그리고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역량이었다.


삼성은 빨랐다. 2006년, 삼성 보르도 TV를 내놓았다. 와인잔을 뒤집어 놓은 듯한 디자인. 기술이 아니라 감각으로 승부했다. 같은 해, 삼성은 글로벌 TV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소니가 38년간 지킨 왕좌를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삼성은 그 자리를 20년 넘게 내놓지 않았다. 2026년 현재까지 20년 연속 글로벌 1위. 판이 바뀌면 새 왕은 오래 간다.


소니는 2004년 일본에서 트리니트론 생산을 중단했고, 2008년 3월 마지막 공장인 싱가포르 라인마저 닫았다. 트리니트론이 죽었다. 40년의 역사, 2억 8천만 대의 유산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텔레비전이 역사의 각주로 사라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소니가 어리석었던 것이 아니다. 소니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계속했을 뿐이다. 문제는 세상이 그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트리니트론은 브라운관 세계의 최고봉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브라운관을 떠났다. 정상에 서 있었는데, 산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깃발을 꽂고 있는데, 발밑의 얼음이 녹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패러다임 전환의 잔인한 문법이다. 전환은 기존의 강자에게 가장 불리하다. 왜냐하면 기존의 강자는 잃을 것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의 강점이 다음 시대의 약점이 된다. 소니의 30년 노하우는 브라운관 세계에서는 넘을 수 없는 해자(垓子)였다. 평판 세계에서는 쓸모없는 유산이었다. 아니,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방해물이었다.


소니는 트리니트론에 투자한 공장과 숙련 인력과 특허 포트폴리오 때문에 평판으로의 전환이 늦었다. 가장 많이 가진 자가 가장 늦게 움직인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이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이것을 연구해 이름을 붙였다. "혁신가의 딜레마." 잘하는 것을 계속 잘하려는 합리적인 판단이, 결국 그 기업을 죽인다. 소니의 경영진이 무능했기 때문이 아니다. 코닥의 경영진이 어리석었기 때문도 아니다. 노키아의 엔지니어들이 게을렀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고객의 목소리를 들었고, 자기 강점에 투자했고, 합리적으로 의사결정했다. 그 모든 합리적 판단이 방향을 잘못 잡은 배의 노를 더 열심히 젓게 만들었을 뿐이다.


반대로, 잃을 것이 없는 자가 가장 빨리 움직인다. 삼성과 LG는 브라운관에서 소니를 이긴 적이 없었다. 이길 수 없었으니 미련도 없었다. 새 게임이 열리자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들었다.


빨리빨리. 과감한 투자. 고객이 원하는 것에 대한 집착. 30년 노하우 대신 30개월의 스피드로 승부했다. 30년 노하우 대신 30개월의 스피드. "젊은 삼성과 LG가 소니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내고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하는 한국인의 습성 때문이다." 그 습성이 아날로그 시대에는 약점이었다. 빨리빨리가 30년의 장인 정신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는 그 약점이 최대의 무기로 뒤집어졌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역사다. 내가 삼성에 있을 때 직접 목격한 장면이다. 입사 초기, 소니는 벤치마크의 대상이었다. 회의실에는 소니의 분해 사진이 붙어 있었고, 출장 보고서에는 소니의 신제품 분석이 빠지지 않았다. '따라잡자'가 암묵적 구호였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공기가 바뀌었다. "따라잡자"가 아니라 "넘어서자"로. 불가능해 보였던 그 문장이 현실이 되는 데 5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더 넓게 보면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코닥은 필름 사진의 제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를 만든 것도 코닥이었다. 1975년, 코닥의 젊은 엔지니어 스티브 새슨이 토스터만 한 크기의 장치를 들고 경영진 앞에 섰다. 무게 3.6킬로그램. 해상도 0.01메가픽셀. 흑백 사진 한 장을 찍는 데 23초가 걸렸다. 경영진의 반응은 이랬다. "귀여운 장난감이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필름이 팔리는 한, 필름을 죽일 기술은 서랍 속에 넣어두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37년 뒤인 2012년 1월 19일, 코닥은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서랍 속 장난감이 제국을 삼켰다.


노키아도 같은 길을 걸었다. 2007년, 전 세계 휴대폰 시장 점유율 51%. 절대 강자였다. 그해 1월,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꺼내 들었다. 6년 뒤인 2013년, 노키아의 스마트폰 점유율은 5% 미만으로 추락했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에 72억 달러에 매각되었다. 한때 시가총액 1,500억 달러였던 기업의 휴대폰 사업이 그 가격이었다.


노키아의 CEO 스티븐 엘롭은 매각 발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우리가 졌습니다." 혁신가의 딜레마를 이보다 정확하게 요약한 문장은 없다. 소니, 코닥, 노키아. 셋의 공통점은 하나다. 이전 시대의 왕이 다음 시대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



스티브 잡스는 이런 전환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2011년 3월, 아이패드 2 발표 무대. 그의 등 뒤에 'Technology'와 'Liberal Arts'가 교차하는 거리 표지판이 떠올랐다. 잡스가 말했다.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술이 인문학과 결합하고, 인간성과 결합할 때, 비로소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결과가 나옵니다."


기술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만나는 지점. 소니는 기술의 정점에 있었지만 그 교차점에는 서 있지 못했다. 삼성 보르도 TV가 와인잔 디자인으로 승부한 것은 기술의 승리가 아니라 감각의 승리였다. 고객이 거실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읽어낸 것이다. 거실 한복판에 놓이는 물건인데, 성능표만 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술 격차가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더 뛰어난 기술이 아니라 더 깊은 이해다.


NFT 아트의 세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수십 년간 기법을 연마한 화가보다, 디지털 감각을 가진 10대가 더 높은 가격에 작품을 팔았다. 축적이 왕이던 시대가 끝나고 있었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연륜보다 민첩성이, 경험보다 감각이 게임을 결정한다. 학력, 나이, 스펙이라는 오래된 장벽이 녹아내린다. 10대 청소년이 유튜브 하나로 억대 수익을 올린다. 대학 중퇴자가 세계 최고의 기업을 세운다. 코닥의 스티브 새슨이 토스터를 들고 경영진 앞에 섰을 때, 그는 스물네 살이었다. 연륜의 벽이 사라진 세계. 그것이 디지털이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변화다.


TV 이야기가 왜 이렇게 긴가 싶을 것이다. 교육 책을 읽고 있는데 왜 브라운관과 코닥과 노키아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런데 잠깐만 들어보세요. TV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교육에 대입하면, 소름 돋을 만큼 구조가 겹친다. 트리니트론의 궤적이 대치동의 미래를 비추고 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트리니트론이다.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시험 기계. PISA 1위. 수능이라는 정밀한 선별 장치. 수십 년간 축적된 입시 노하우. 전 세계 어디에도 한국만큼 정교한 시험 준비 시스템은 없다. 대치동의 학원가는 소니의 구마모토 공장과 같다. 그 안에 30년의 시행착오가 녹아 있다. 어떤 유형이 출제되는지, 내신 서술형의 채점 기준이 무엇인지, 11월 수능 직전 마지막 2주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 그 감각은 매뉴얼로 전달할 수 없다. 시간으로만 축적된다. 소니의 형광체 배합처럼.


그런데 게임이 바뀌고 있다. AI라는 평판 디스플레이가 등장했다. 지식을 암기하고 정해진 유형의 문제를 정해진 방식으로 푸는 능력 — 소니가 유리관의 곡률을 0.01밀리미터까지 제어하던 바로 그 종류의 역량이다. 브라운관 시대의 역량. AI가 그 역량을 평준화시키고 있다. 10년 경력의 전문가가 아는 것을 AI를 통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아느냐"는 더 이상 차별화 요인이 아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다른 무언가다. 스피드가 아니라 — 그것은 삼성이 소니를 이겼던 방법이었고, AI 시대의 답은 아니다 — 질문하는 능력, 맥락을 읽는 능력,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 브라운관에서 평판으로 넘어갈 때 기술력보다 고객 이해가 중요해졌듯, 암기에서 AI로 넘어가는 시대에는 지식의 양보다 통찰의 깊이가 중요해진다.


대치동의 노하우는 소니의 트리니트론 기술과 같다. 지금은 여전히 작동한다. 브라운관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듯, 수능도 내일 당장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니도 트리니트론이 죽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코닥도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하고 파산하기까지 37년이 걸렸다. 전환은 느리게 시작해서 한순간에 끝난다. 헤밍웨이의 소설에 나오는 파산처럼. "어떻게 파산했느냐고요? 두 가지 방법으로.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방향은 정해졌다. 브라운관에서 평판으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암기에서 사고로. 소니가 트리니트론의 마지막 공장을 닫은 2008년, 그 시점에서 브라운관의 미래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가전매장에서 브라운관 TV를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교육에서 정확히 그 일을 하고 있다. 평판 디스플레이가 이미 거실을 점령한 시대에, 브라운관 기술의 미세한 차이를 다투고 있다. 내신 1.3등급과 1.5등급의 차이를 위해 아이의 여름방학 전체를 바치고 있다. 수학 킬러 문항 한 문제를 더 맞히기 위해 새벽 2시까지 학원에 앉아 있다. 브라운관의 곡률 0.01밀리미터를 다투던 소니 엔지니어와 같은 표정으로.


2005년, 소니의 엔지니어들은 트리니트론의 색감을 0.1% 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밤을 새우고 있었다. 그 순간 세상은 이미 LCD로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수학 1등급을 0.5점 차이로 다투며 밤을 새고 있다. 그 순간 세상은 이미 AI로 넘어가고 있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이전 시대의 최고가 다음 시대의 최약이 된다. 소니가 그 증거다. 가장 많이 가진 자가 가장 늦게 바뀐다. 가장 늦게 바뀌는 자가 가장 크게 무너진다. 소니는 트리니트론이 죽은 뒤에도 플레이스테이션과 이미지 센서로 부활했다. 새 게임을 찾았기 때문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낡은 게임을 버리고 새 게임을 찾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다만 교육은 소니보다 잔인하다. 소니가 늦게 전환해서 잃은 것은 시장 점유율이었다. 교육이 늦게 전환해서 잃는 것은 아이들의 시간이다. 주가는 회복할 수 있다. 열다섯 살의 여름방학은 돌아오지 않는다. 소니은 트리니트론이 죽고도 다시 일어섰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리셋 버튼은 없다.


소니의 이야기는 하나의 기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코닥의 이야기도, 노키아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것은 전환의 문법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문법의 핵심 법칙은 이것이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이전 시대의 가치 기준도 함께 바뀐다. 브라운관 시대에는 정밀한 공정 기술이 가치였다. 평판 시대에는 스피드와 감각이 가치였다. 기계 시대에는 체력이 가치였고, 정보 시대에는 지식이 가치였다. 매번, 도구가 바뀔 때마다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기준이 함께 바뀌었다. 소니의 엔지니어가 하루아침에 무능해진 것이 아니다. 코닥의 화학자가 갑자기 멍청해진 것도 아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AI 이후, 사람의 경제적 가치는 무엇으로 매겨지는가. 체력의 시대를 지나고, 지식의 시대를 지나,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의 입구에 서 있는가. 트리니트론이 죽은 뒤 삼성이 살아남은 것은 더 좋은 브라운관을 만들어서가 아니었다. 아예 다른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교육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더 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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