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가격

챕터9

by 송영광

1965년, NASA의 한 엔지니어가 질문을 받았다. 우주선에 왜 굳이 사람을 태우느냐. 로봇이 더 싸고, 더 가볍고, 밥도 안 먹고, 산소도 필요 없지 않느냐.


답변이 돌아왔다. "인간은 비선형 처리가 가능한 가장 값싼 범용 컴퓨터 시스템이며, 심지어 중량이 68킬로그램 정도로 매우 가볍다."


값싼. 범용. 68킬로그램.


그것이 인류를 달에 보내려던 사람들이 매긴 인간의 가격표였다. 로맨틱하지는 않다. 하지만 정확했다.


당시 NASA에겐 그 답밖에 없었다. 의회가 묻고 있었으니까. "왜 사람을 태워서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느냐?"


기술자의 답변은 기술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려면 숫자로 말해야 했다. 처리 속도, 무게, 범용성. 그래야 예산이 나왔다.


그리고 이 가격표는 시대마다 다시 쓰여졌다. 사람의 값은 고정된 적이 없다. 도구가 바뀔 때마다 달라졌다.


돌도끼가 등장했을 때, 증기기관이 등장했을 때, 컴퓨터가 등장했을 때. 매번 같은 일이 벌어졌다. 도구가 기존의 가치를 먹어치우고, 사람은 새로운 가치를 찾아야 했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 돌멩이를 집어 다른 돌에 내리쳤다. 깨진 단면이 날카로웠다. 그것을 나뭇가지에 묶었다. 돌도끼. 인류가 기록한 최초의 도구였다.


여기서 하나의 우화가 시작된다.


마을의 노인이 호통을 쳤다.


"어리석은 놈! 신이 주신 가장 거룩한 도구인 맨손을 모욕하고 있다. 그 돌덩이에 의지하다 보면, 너의 주먹은 물렁해질 것이고 손아귀의 힘은 사라질 것이다. 결국 인간은 짐승보다 약한 존재가 될 게야!"


노인의 이름은 우려(憂慮)였다.


예언은 반은 맞았다. 인간의 주먹은 정말 약해졌다. 침팬지의 근력은 같은 체중 기준으로 성인 남성의 1.5배다. 우리는 이미 짐승보다 약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틀린 반쪽이 더 중요하다. 약해진 손으로 집을 짓고 밭을 일궜다. 곰을 맨손으로 잡을 필요가 없어진 대신, 곰이 오지 못하는 성벽을 쌓았다.


도구가 기능을 대체하자, 인간의 가치는 기능 바깥으로 이동했다. 주먹의 힘이 아니라, 무엇을 지을 것인가를 상상하는 힘으로.


도구가 힘을 대신하자, 인간은 더 약해진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로워졌다. 기능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기능 너머의 것을 얻은 것이다.


이 패턴은 모든 도구의 역사에서 반복됐다. 문자가 등장하자 우려 노인의 후손이 다시 나타났다.


"종이에 의지하면 기억력이 사라질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이름조차 종이를 봐야만 아는 멍청이가 될 것이다."


인쇄술이 등장하자 같은 탄식이 나왔다. "필사가 사라지면 글의 무게도 사라질 것이다."


매번 같은 구조였다. 도구가 기능을 먹고, 인간은 기능 너머로 올라갔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사유가 남았고, 필사가 사라진 자리에 저술이 남았다. 도구에게 빼앗긴 것은 항상 '기능'이었고, 인간에게 남은 것은 항상 '그 기능 위에서만 가능한 더 높은 능력'이었다.


우려 노인은 뺏기는 것만 보았다. 바보는 얻는 것을 보았다.


문제는 지금이다. AI는 이전 도구들과 차원이 다르다.


돌도끼는 주먹을 대체했고, 문자는 기억을 대체했고, 인쇄술은 필사를 대체했다. 각각의 도구는 인간의 '일부'를 대체했다. AI는 생각을 대체한다.


보고서를 쓰고, 코드를 짜고, 법률 문서를 분석하고, 의료 영상을 판독한다. 변호사가 일주일 걸려 읽던 계약서를 30초에 요약하고, 방사선과 전문의가 놓친 종양의 그림자를 잡아낸다. 지금까지 '머리 좋은 사람'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일들이다.


생각마저 대체당하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답을 찾으려면, 사람의 값이 어떻게 매겨져 왔는지를 정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공포는 대개 무지에서 온다.


도구가 바뀔 때마다 인간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면,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역사에서 가격표는 세 번 다시 쓰여졌다.


제1시대. 체력.


농경사회에서 사람의 값은 몸이었다. 100킬로그램을 들 수 있느냐, 85킬로그램만 들 수 있느냐. 그것이 채용 조건이었고, 임금의 기준이었다.


영국 산업혁명 초기에도 이 논리는 유효했다. 남성 방직공의 주급은 15실링, 여성은 7실링. 같은 시간을 일해도 힘이 곧 돈이던 시대였다.


아이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열 살짜리가 주급 2실링을 받으며 탄광에 들어갔다. 작은 몸이 좁은 갱도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체력의 시대는 아이의 몸까지 경제적으로 환산하는 시대였다.


증기기관이 이 판을 뒤집었다. 1톤을 드는 기계 앞에서, 100킬로그램을 드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쓸모를 잃었다. 체력은 더 이상 희소하지 않았다.


기계가 힘을 대체한 순간, 사람의 값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기계를 다루려면 읽고 쓸 줄 알아야 했다. 의무교육이 도입된 배경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지식의 시대'가 아니었다. 읽기, 쓰기, 기본 수학. 중학교만 나오면 공장을 돌릴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 요구한 것은 고도의 전문 지식이 아니라 기본적인 문해력과 숙련된 기능이었다. 대학이 필요한 세상이 아니었다.


체력의 시대는 끝났지만, 진짜 지식의 시대는 아직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제2시대. 지식.


20세기 중반, 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기술은 폭발적으로 복잡해졌고, 단순히 기계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조직하고 분석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값이 되기 시작했다.


피터 드러커는 1959년에 이 변화를 포착한 사람이다. 그는 "지식근로자"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 자체가 생산 도구인 사람들. 변호사, 의사, 엔지니어, 회계사.


이들의 도구는 근육이 아니라 전문 지식이었고, 대학 졸업장이 이 세계의 입장권이었다. 대학 졸업자와 고졸자의 평균 생애소득 격차는 미국 기준 약 100만 달러. 한국 원화로 환산하면 13억이 넘는다.


대학 4년의 투자수익률로는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지식은 확실한 투자였다.


이 시대가 만든 시스템이 바로 지금의 교육이다. 시험으로 지식의 양을 측정하고, 순위를 매기고, 그 순위대로 사회적 자리를 배분한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더 비싼 사람. 대학 졸업장은 중산층 진입의 통행증이었다.


한국은 이 시스템을 가장 극단적으로 완성한 나라다. 수능이라는 단일 시험에 인생의 값이 매겨진다.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지식 측정 기계를 만든 셈이다.


문제는, 그 기계가 측정하는 것의 가치가 급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그 시대의 수혜자였다. 삼성 무선사업부에서 휴대폰을 개발하던 시절, 나의 값은 기술에 대한 지식이었다. 회로 설계를 더 잘 아는 엔지니어가 더 빨리 승진했고, 더 높은 연봉을 받았다.


이상하지 않나요. 불과 20년 전의 이야기인데, 벌써 다른 시대처럼 느껴진다. 지금 신입 엔지니어에게 회로도를 한 장 한 장 그리라고 하면 웃을 것이다. AI가 수백 개의 설계안을 30초 만에 뽑아내니까.


그 시대가 끝나고 있다.


제3시대. 영감.


많은 사람들이 AI 이후의 가치를 "통찰"이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지식을 엮어서 새로운 답을 만드는 능력. 일견 그럴듯하다.


하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AI가 이미 그것을 한다. 서로 다른 분야의 논문 수천 편을 읽고 연결 고리를 찾는 일, AI는 인간보다 빠르고 넓게 해낸다.


통찰이 답이라면, 그 답도 곧 먹힌다.


그렇다면 AI가 구조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영감(Inspiration)이다.


영감은 통찰과 다르다.


통찰은 "아, 그렇구나"에서 끝난다. 영감은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로 이어진다. 통찰은 머리를 움직이지만, 영감은 마음을 움직여서 행동을 바꾼다.


영감의 뿌리는 자의식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것을 하는가. 나는 무엇이 두렵고,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존재만이 영감을 만들어낸다.


AI는 질문에 답할 수 있지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를 묻지 않는 존재는, 존재의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


영감이란 결국 자기 존재를 의식하는 자만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흔드는 힘이다.

영감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살아낸 서사다. 정보는 누구나 줄 수 있다. 하지만 "나도 안 될 것 같았는데, 해봤더니 됐다"는 직접 살아본 사람만 할 수 있다.


고뇌, 실패, 극복. 자의식이 없으면 고뇌도 없다. 내가 부족하다는 인식이 없으면 성장도 없다. AI는 데이터를 처리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하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극복이 없으니 서사도 없다.


살아본 적 없는 존재는 살아가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 회사를 세 번 말아먹은 창업자의 조언이 경영학 교수의 강의보다 묵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처가 없는 조언은 가볍다.


둘째, 감정의 공명이다. 영감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 전달이다.


2005년,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졸업식에서 연설했다. 그는 기술을 말하지 않았다. 대학을 중퇴한 이야기,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난 이야기, 암 선고를 받은 이야기를 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한마디가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꿨다.


정보량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 두려움이 있고, 수치심이 있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는 인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AI가 더 정교한 졸업 연설문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암 병동에서 죽음을 바라본 적 없는 존재가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라"고 말할 때, 그 문장에 무게는 없다.


극복은 자신감이 되고, 자신감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된다. 그것이 영감의 구조다.


셋째, 신뢰다. 그리고 이것이 영감의 시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다.


AI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기획팀, 개발팀, 영업팀, 품질관리팀 — 전형적인 기업 조직에서, 30년 뒤 어떤 팀이 가장 줄고 어떤 팀이 가장 느는가.


답이 의외였다. 가장 줄어드는 팀은 개발팀이었다. AI가 코드를 쓰고, 설계를 하고, 테스트를 돌리니까. 지식의 전형인 엔지니어링이 가장 먼저 줄어든다.


가장 느는 팀은? 영업팀. 두 배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핵심인 조직이 살아남는다.


왜 영업이 느는가. AI가 기술을 평준화시키기 때문이다. 제품의 품질 차이가 사라진다. 모두가 비슷한 수준의 제품을 비슷한 속도로 만들 수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뭘 보고 결정하는가.


누구한테 사느냐다. 신뢰하는 사람이 소개하는 것, 신뢰하는 사람이 만든 것. 기술이 평준화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더 중요해진다.


생각해보면 이미 그렇다. 똑같은 보험 상품을 열 명의 설계사가 판다. 보장 내용은 동일하다. 보험료도 같다. 그런데 누구한테 가입하는가.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아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은 사람에게, 내가 곤란할 때 전화를 받을 것 같은 사람에게. 그것이 신뢰다. AI가 모든 기술을 평준화한 뒤에도 남는 것. 그 연결의 핵심이 영감이다.


이 사람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무엇을 극복했는가. 그 서사가 신뢰를 만들고, 신뢰가 선택을 만든다. 영감의 시대에는 스토리가 곧 가치다.


드러커는 지식의 시대를 정의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많이 알면 된다"고 말한 사람이 아니다.


"전과목 A학점을 받는 학생은 성취하는 학생이 아니라 순응을 잘하는 학생"이라고 했고, 지식을 목적과 연결하는 능력, 혁신, 자기경영까지 시야를 넓혔다. 드러커는 지식 너머를 예감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가 서 있던 시대에는 도구가 아직 따라오지 못했다. 지식 너머로 가고 싶어도, 지식을 처리해줄 도구가 없었다. AI가 그 도구를 가져왔다.


체력에서 지식으로, 지식에서 영감으로. 사람의 값은 몸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하락이 아니라 상승이다. 가슴은 머리보다 낮은 곳이 아니다. 더 깊은 곳이다.


자, 여기서 돌도끼 이야기로 돌아가자.


마을의 우려 노인은 돌도끼가 주먹을 약하게 만들 것이라 경고했다. 도구가 인간을 망친다고. 하지만 바보는 달랐다.



바보는 돌도끼를 잡고 자기가 약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돌도끼가 주먹을 대체했을 때, 우려 노인은 말했다. "주먹이 약해졌으니 인간이 약해졌다." 문자가 기억을 대체했을 때, 우려의 후손은 말했다. "기억력이 사라졌으니 인간이 멍청해졌다."


AI가 지식을 대체하는 지금, 우려의 마지막 후손이 말한다. "생각을 빼앗겼으니 인간이 끝났다."


하지만 진짜 바보는 도구를 쓰는 자가 아니다. 자신의 가치가 고작 도구 하나 때문에 사라질 것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작게 여기는 자다.


돌도끼를 잡은 손은 약해졌지만, 그 약해진 손으로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다. 세계 최초의 예술이었다.


우화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우려의 마지막 후손이 공포에 질려 손자의 컴퓨터를 꺼버리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나 묻는다.


"그대의 조상은 돌도끼가 주먹을 없앨 것이라 했으나, 인간은 손으로 문명을 지었다. 그대의 아비는 종이가 기억을 없앨 것이라 했으나, 인간은 기록으로 영원을 얻었다. 그대는 이제 AI가 생각을 없앨 것이라 하는가?"


천사가 가리킨 것은 컴퓨터 화면이 아니라 창밖의 세상이었다. 도구가 짐을 덜어줄 때마다, 인간은 그 빈자리에 더 큰 꿈을 채워왔다.


도구는 인간의 기능을 대체하지만, 인간의 본질을 대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주먹이 사라지자 손이 남았고, 그 손으로 문명을 지었다. 기억이 사라지자 사유가 남았고, 그 사유로 역사를 썼다.


지식이 사라지면 영감이 남는다. 고뇌하고, 극복하고, 그 이야기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불을 붙이는 힘. 그것은 도구가 대체할 수 없는, 살아본 자만이 가진 것이다.


돌도끼의 교훈은 분명하다. 도구가 빼앗는 것은 기능이고, 인간에게 남기는 것은 가능성이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올라간 것이다.


올라간 계단은 내려올 수 없다.


증기기관이 등장한 뒤, 다시 체력이 사람의 값이 된 적은 없다. 컴퓨터가 등장한 뒤, 주판을 빨리 튕기는 능력이 연봉을 결정하지 않는다. AI가 지식을 대체한 뒤, 다시 암기가 사람의 값이 될 일도 없다.


계단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위로.


체력이 희소할 때는 체력이 값이었다. 지식이 희소할 때는 지식이 값이었다. AI가 지식을 풍요롭게 만든 지금, 희소한 것은 무엇인가.


영감이다. 살아온 시간의 무게, 넘어지고 일어선 경험, 그것을 나눌 때 다른 사람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힘.


AI는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있지만, 아무것도 살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영감을 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값이다.


다시 NASA 이야기로 돌아오자.


2007년, 커프스 단추와 절연 테이프로 우주정거장의 태양전지판을 고친 우주비행사 스콧 파라진스키. 영하 100도와 영상 100도를 오가는 우주 공간에서, 감전 위험을 안고, 매뉴얼에 없는 수리를 해낸 것이다.


그가 한 일은 문제 해결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 이야기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커프스 단추 하나로 우주를 고친 남자. 그 서사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다. 데이터가 아니라 이야기가. 로봇이 같은 수리를 했다면, 보고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파라진스키가 했기에, 전설이 되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제2시대의 문법으로 제3시대의 아이를 기르고 있다.


아이에게 더 많은 지식을 채워넣는 것은, 증기기관이 돌아가는 공장 앞에서 역기를 드는 것과 같다. 땀은 나지만 기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곳이 학원가라는 점이다. 대치동 학원 원장들도 안다. 지식 주입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수능이 존재하는 한, 부모가 성적을 원하는 한, 기계는 멈추지 않는다.


생각해보세요. 우리 아이가 10년 뒤 사회에 나갈 때, 그 아이의 값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험지에 적은 정답의 개수일까요, 아니면 자기만의 이야기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일까요.


영감은 학원에서 주입되지 않는다. 교과서에서 외워지지도 않는다. 영감은 직접 부딪히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 안에서만 자란다. 무언가를 만들어본 사람, 넘어져본 사람, 그래도 다시 시작한 사람 안에서.


우리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은 정답이 아니라 경험이다. 넘어져도 괜찮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아이가, 일어서는 법도 몸으로 안다.


그렇다면 영감이 가치인 시대, 누가 유리할까요. 수백 명을 거느린 거대 조직인가, 혼자 서 있는 개인인가.


답은 의외의 방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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