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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Sep 09. 2021

창작, 그 치열한 생의 흔적.

나만의 진리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에 글쓰기 모임 사람들과 함께 대구미술관에 다녀왔다.


정말 오랜만에 가본 미술관. 가까운 거리인데도 코로나가 다시 심해지면서 가지 못했지만 철저한 감염 대비를 위한 100% 예약제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모임 사람들과 함께 방문했다.      


미술관에서 발열 체크 및 예약 확인을 한 뒤 입장한 미술관. 우리의 일상에서 이제 발열체크와 신분확인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첫 작품부터 눈에  띄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시계가 달빛 같은 빛을 품고 있었다. 달이 흐르는 시간을 보여주거나 또는 늘 떠있는 달의 흐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간을 그린 것이거나. 어쨌든 첫 입장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런 인상적인 첫 작품을 시작으로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감상했다.      

1층의 전시들을 돌아보고 요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건희 컬렉션의 작품들까지 둘러보고 나자 이미 관람 가능한 시간이 다 흐른 뒤였다.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술관에서 나오는 길, 요즘 거의 매일 비가 오는 우중충한 하늘이었는데, 마침 그날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하늘도 맑고 푸르렀고, 적당히 강한 햇빛과 살짝 시원한 가을의 공기가 흘렀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미술관을 나오면서 나는 감상했던 수많은 작품들을 떠올렸다. 좋은 작품들이 참 많았고, 작가들의 작품들을 한 점 한 점 볼 때마다 그걸 만든 작가들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작품들 말고도 작품 설명에 집중해서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었다.      


- 이 작품들은 어떤 심정으로 만들었을까? 저 작품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만들었을까?     


나는 전과 다르게 작가들이 어떤 심정으로 작품들을 창작했을지 그게 궁금해졌다.   

   

그들에게 창작은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 즉 자신의 생애의 치열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 창조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술관에 조용히 전시되어 있지만 그 작품들은 모두 역동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나 여기 이걸 설명하고 싶어! 이렇게 아우성치며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리 보였다.      


작가들마다 색감도, 형태도, 질감도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참 개개인의 개성이 이토록 다르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아닌 사람들과 나의 ‘다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각각의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듯이 같은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해석도 모두 달라지겠지.      


우리는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배척하지만, 또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는 걸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인간이 공통점을 찾을 때 우리는 신기해하고, 동질감을 느끼고, 연민을 느끼지 않는가. 결국 서로가 모두 다르다는 점을 그 저변으로 깔고 있을 때 우리는 같은 점을 찾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 다름이 바로 나만이 가진 개성이고, 우린 우리가 사는 생애 동안 이 개성을 살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이름이 다른 사람으로 불리면 꼭 정정을 해주고 싶고, 길거리를 지나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오면 가슴이 철렁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고유의 특성을 잠식당하면 힘들어하고 우울해한다.      


이런 개개인의 특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를 생각하며 나는 육아할 때를 떠올렸다. 육아를 할 때에 우린 이런 욕구가 특히 더 높아지는 것 같다.


나 역시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세상의 중심이 전부 아이 위주로, 즉 모든 라이프 스타일이 아이 중심으로 바뀌었었다. 고유의 나만의 이름으로 불리다 나는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고, 몇 년이 지나 그 이름에 익숙해졌다. 누구누구의 엄마. 하지만 그런 나날들이 계속될수록 나는 나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엄마가 된 사실이 참 기쁘고 벅찬 일이지만 결국 나는 나고, 아이는 아이다.


아이가 내 뱃속에서 나왔다고 해서 나의 부속품이 아닌 개별적인 존재이듯이 나는 엄마이면서 동시에 내 이름을 가진, 나름대로의 개성을 축적하며 살아온 개인인 것이다.


이걸 지운 듯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밥을 먹이고, 재우고 쳇바퀴 도는 삶을 계속하다 보니 나는 우울해졌었다. 아이 젖을 먹이고 있을 때면 내가 꼭 걸어 다니는 젖통처럼 느껴지고, 나라는 사람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어렸을 때 더 힘들어했던 것 같다.      


김진호 님의 가족사진이라는 노래에도 있지 않은가.

 나를 꽃 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이라는 가사가.     

우리는 아이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거름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내 안의 개성을 잃어가다 안 되겠다 싶어 아이 등원시킬 때만이라도 나 스스로로 살아보기 위해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여러 활동을 해오면서 깨달은 게 있다. 누구의 엄마들이 된 사람들은 내가 그렇듯 그들도 좀 더 내 이름을 뚜렷이 남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어쩌면 아이를 양육하기 전 보다 더 말이다.


 그게 독서이든, 문화센터를 다니며 취미활동을 하든, 전과 다른 일을 도전하든 누군가의 엄마로 내 이름을 잊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가 스스로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독서를 해서 서평을 쓰거나 SNS에 사진과 글을 올리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취미활동을 해서 강사 자격증을 딴다거나 이런 것들 모두 어쩌면 ‘창작’ 활동이 아닐까?


같은 책을 봐도 모두의 감상이 다르고, 같은 영화를 봐도 누군가에겐 재밌고, 누군가에겐 아닌 것처럼 각자 고유의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해석한다. 누군가 느껴주지 않는 나만의 고유한 느낌. 그것 자체가 창작이지 않을까.     


꼭 미술관에 전시하는 작가가 아니라도 우리는 이제 쉽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해 공유할 수 있는 세상에 산다. 유투버를 꿈꾸고 SNS 스타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은 이런 시대에 우리 개개인 누구나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우리 생의 치열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유리한 시대에 살고 있다.      


육아를 공감하는 것만으로 풀리지 않는, 스스로의 나 자신이 되었을 때의 그 짜릿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창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글을 쓰며 창조를 멈추지 않게 된 것처럼 말이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욕심, 그것이 사람들에게 통했을 때의 짜릿함. 그 힘으로 또 다음 글을 쓰곤 한다.      


나는 말하고 싶다.

이제 가능한 모두,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자.


창조하자. 우리 생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무언가를 창조하자. 내가 여기 살아있노라 외치기 위해 말이다.      

아이들이 더 이상 내 손 없이도 혼자 스스로 잘 나아갈 만큼 커서 만개했을 때, 아이 꽃 옆에 내 꽃도 당당히 아름답게 피도록 우리는 창작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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