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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자 Feb 22. 2021

눈 덮인 한라산은 내 버킷리스트였어요

컨셉진에서 인터뷰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데, 한 달간 매일 주는 질문들에 답해 나를 인터뷰한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것.



요즘 열일하는 컨셉진이 궁금해서 기웃대다 거금 7만원 가량을 들여 결제해버렸는데, 어이없게도 메일로 날아오는 질문을 거의 이주일 정도가 지난 후에야 알아서 엄청나게 밀려있는 상태다. 나 답다.


11일차 질문의 답변을(이 시점은 이미 21개 질문까지 전달된 상태이나...) 작성하다가 추억에 잠겨서 브런치에도 남겨두려고 쓰는 글.




11.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내가 봐도 내가 멋있을 때가 있어요. 당신의 삶에서 박주연 님이 가장 멋있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눈 덮인 한라산에 올라본 적이 있나요? 전 있답니다. 한라산에 오르는 건 제 오랜 버킷리스트였어요. 2005년 드라마인 <내 이름은 김삼순>이 저의 인생드라마인데요. 삼순이가 오른 한라산을 저도 꼭 한 번 오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한창 취업이 안되어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때에, <아빠 어디가>를 봤고 그 때 10준수가 눈 덮인 한라산을 오르는 장면이 나왔어요. 잊고 지냈던 저의 버킷리스트가 떠올랐고 이것 하나를 이루는 것만으로도 바닥을 친 제 자존감이 한라산 초입 정도만큼은 올라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행기를 예매하고 며칠 뒤에 바로 2박 3일의 제주도행을 떠났어요. 목표는 오로지 한라산 등반이었어요.



혼자 여행을 가는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지금은 달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MBTI도 I로 시작하는(TMI지만 INFJ임), 몇 번을 해도 무조건 I인 내향적인 사람인데요. 4인이 이용하는 도미토리에 혼자 가는 것도 저에겐 정말이지 큰 도전이었습니다. 


한라산은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산은 아니더라구요. 숙소에 도착한 그 날도 날씨 탓으로 입산이 금지되었다며, 갈 수 있을런지 싶다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의 말을 들었거든요. 하지만 하늘이 도왔고 무사히 한라산에 오를 수 있게 됐어요. 저는 새벽에 일어나는 걸 정말 끔찍하게 싫어해요. 눈 떴을 때 바깥이 깜깜한 걸 용납할 수가 없거든요. 하지만 그 날은 4시반이라는 말도 안되는 시간에 숙소를 나서면서도 마음이 가뿐했어요. 


그렇게 한라산을 올랐답니다. 티비에서 보던 대로 하얀 눈이 덮여있고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어있더군요. 꽁꽁 싸매고 갔지만 중간 부터는 더워서 옷도 가볍게 입은 채 올랐어요. 사실 그 때 감기가 걸려있는 상태라 몸도 좋지 않았지만, 이 때가 아니면 다시 그런 결심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오기로 끝까지 올랐어요. 산 중턱 즈음에서 물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도 한 병 없이 산을 올랐는데 대피소에서도 물을 안팔더라구요. 라면 국물에 약을 먹었던 기억이 아주 또렷합니다... 그렇게 도착한 백록담. 정말 멋지더라구요. 저 자신이. 나를 위해 나를 깨는 일을 한 제가 장했어요.


모르는 아저씨에게 사진도 한 장 부탁해서 엘사같은 사진도 한 장 남아있네요. 2014년 사진이라 화질은 저 세상입니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중에는 산악회 어머님, 아버님들의 관심도 한 눈에 받았답니다. 아가씨가 혼자 산에 왔냐며 계속 말동무를 해주시더라구요. 위에 말했듯 I인 저에게 꽤 힘든 상황이긴 했지만 그 당시에도, 지금도 꽤 즐거운 기억이에요.



무려 카카오스토리에 올려뒀던 사진입니다. 


오랜 꿈을 실천한 것, 생각한 자리에서 바로 저지른 것,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한 것, 평소의 나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 모든 것이 완벽히 멋졌던 당시의 저에요.






컨셉진 덕에 기억도 더듬어보고, 좋은 프로젝트에 참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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