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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자 Dec 11. 2021

리스본에서 - 시간 도둑, 도둑 시장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숙박공유업체의 슬로건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여행도 그렇다. 현지인이 사는 동네에서 아침이면 슬리퍼를 신고 터덜터덜 나와 집 앞 카페에서 크루아상과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는 것, 붉게 지는 노을을 보며 계단에 걸터 앉아 술 한 병을 옆 사람과 나누고 저녁엔 마트에 들러 찬거리를 장 보는 것. 그래서 어느 도시에서든 편의점, 마트, 벼룩시장, 파머스마켓 등에 가는 걸 가장 좋아한다. 나의 여행에선 금문교, 도쿄타워, 101타워도 시장 앞에선 힘이 없다.


첫 유럽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도 벼룩시장이다. 유럽 벼룩시장에서 엔틱한 고급 잔과 장신구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득템했다는 각종 매체의 여행기를 보며, 가기 전부터 전투력을 단단히 하고 선배와 나 둘 다 가벼운 에코백을 둘러맨 채 여자 도둑 시장(이하 도둑 시장)으로 향했다.


리스본에는 많은 시장이 있지만 도둑 시장이 가장 유명하다. 13세기부터 열린 이곳의 시작은 도둑이 훔친 물건을 늘어놓고 판 것이라니, 그 기원은 꽤 찝찝하다.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것을 판다는 소리부터 인사동 골동품 가게 사장님이 100만 원 어치를 싹쓸이해갔다는 말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포르투갈 여행 전 들른 바르셀로나에서의 과소비로 포르투와 리스본에서는 지갑을 봉인한 중이었기에 물욕 단속에 신경 쓰며 시장으로 갔다. 에코백을 텅텅 비워 간 것과 모순되는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알파마 지구에 있는 시장은 28번 트램을 타고 그라사 정류장에서 내려 가면 된다. 인파와 함께 열심히 언덕을 오르면 시장 초입에 닿는다. 알파마는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지구로 도시의 85%가 붕괴된 대지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언덕 위 동네다. 도둑 시장에 갈 계획이라면 빈티지한 도시 리스본에서도 가장 빈티지한 알파마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도 좋다.


도둑 시장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말은 '한 바퀴만 돌고 가자'. 이 곳에서 한 바퀴를 돈다는 것은 곧 개장부터 파장까지 있겠단 것을 의미한다. 그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한쪽을 둘러보고 있으면 어느새 반대쪽에 막 자리를 잡은 상인의 돗자리가 펼쳐져 있고 같은 제품이 없으니 하나하나 보다 보면 시간을 도둑맞기 십상이다.




시장에 실망하는 사람도 제법 많다. 대체 뭘 사라는 건가 싶은 물건들이 빼곡한 것이 이유다. 예쁜 반스 운동화가 있기에 자세히 보니 한 짝뿐이라거나, 쓰던 칫솔을 들고 시장에 나왔다거나, 하물며 싱크대를 통째로 뜯어온 상인도 있었다. 하지만 시장을 돌아보며 점점 빈티지에 관대해짐을 느꼈다. 쓰던 칫솔은 화장실 청소에 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 그렇게 너른 마음으로 둘러보니 예쁜 물건이 하나둘 보인다. 빈티지하고 예쁜 찻잔, 가성비 좋은 장신구 보관함 그리고 처음 보는 문양의 아줄레주까지.


빈티지한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새 물건을 파는 상인도 많다. 행운을 상징하는 수탉이 디자인된 앞치마 등도 인기고, 코르크로 만든 각종 가방과 가죽으로 된 지갑까지, 천지가 지갑 열릴 곳 투성이다. 오래되면 오래된 대로, 새것이면 새것인 대로 사고 싶으니 이번 생은 부자 되기 정말 어려운 것 같다.


도둑 시장을 둘러보면 리스본의 시간과 이야기가 읽힌다. 똑같은 커피 잔 여러 개를 파는 것을 보니 근처 카페가 최근 폐업한 모양이고, 빈티지 포크의 사이즈가 큰 걸 보면 과거 리스본 사람들은 대식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리스본의 시간과 이야기가 담긴 물건이 지금 서울 내 방에 있는 게 참 낭만적이다. 심히 작은 찻잔과 소주 한 잔도 안 담길 와인 잔, 수줍게 살짝 오므린 손바닥 모양의 장식품은 리스본에서 어떤 시간과 이야기를 가졌을까.



출간했던 도서 <타인의 포르투갈>에서 발췌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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