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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우 Sep 11. 2021

친절한 사람

친절의 폭력성

그에게 손바닥을 한 대 맞았을 때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입을 오므렸다. 오늘은 한 대다. 겨우 한 대. 다른 사람은 다섯 대를 맞았다. 열 대, 스무 대를 맞는 사람도 있었다. 손바닥 한가운데에 불그스름한 막대기 자국이 말갛게 올라왔다. 활활 타오르는 것도 아니었고 시큰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딱히 상처라 말할 수 없었다. 스무 대를 맞았던 사람이 자기는 피멍이 든 것 같다며 내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니. 나는 겨우 한 대. 한 대를 맞았는데.


이틀에 한 번 그렇게 ‘타작식’을 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으레 진행하는 행사였다. 그곳의 학생들은 월/수/금 주기로 같은 시간에 모여 전날 푼 수학 문제집의 답안을 확인했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숫자 템포에 맞춰서, 다소 신명나게 ‘O’와 ‘/’를 그려 넣는 일이었다. 그런 학생들의 문제집 뒤편은 그들의 초조한 숨이 드나들 수 있도록 뻥 뚫려 있었다. 그곳을 채우고 있던 답지는 오직 선생님만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문제집이나 교재를 시작할 때마다 학생들의 답지는 그들의 머리수만큼 강의대 앞에 두껍게 쌓이곤 했다. 그 무수한 답지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다른 선생님들에게 나누어주기엔 조금 많은 양이었고, 나는 그들이 무심히 폐기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차라리 처음부터 답지가 없는 문제집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틀린 문제의 개수만큼 손바닥을 맞았다. 만점은 0대, 98점은 1대, 96점은 2대 순이었다. 사실 점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시험이 아닌 그저 연습문제집의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대를 맞은 날에는 98점짜리 숙제를 했다고 여기는 것이 편했다. 문제 난이도와 개수를 고려해 나름대로 배점을 주었을 때 그 정도가 적당했다. 어느 날 90점 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90점 아래로 떨어지는 날에 손바닥을 겸허히 내밀기에도 편했다. 그런 잘못된 사람은 당연히 맞아야 했고,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어차피 겨우 손바닥일 뿐이었다. 주먹세례도 아니고, 뺨도 아니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버스 안에서 내게 답안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숙제를 하나도 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틀린 문제가 똑같으면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굳이 위험 요소를 안으면서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인정하고 맞는 편이 그 친구에게도 더 나을 것 같았다. 손바닥 때문이라면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숙제를 하나도 하지 않은 학생은 조금 봐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빈 문제집을 가져온 학생을 두고 선생님이 그만큼 다 때리기는 힘드니까, 예를 들어 쉰 대를 맞을 걸 스무 대만 맞으면 된다. 그냥 그러면 되는 것이었다.


그 학생은 일단 내 답안을 베껴간 뒤 채점할 때 적당히 답안을 고쳐 ‘O’와 ‘/’의 비율을 조정하겠다고 말했다. 틀린 문제의 개수도 평소 자기가 틀렸던 수준으로 절묘하게 맞출 것이라 했다. 우리의 채점 방식은 선생님이 불러주는 정답에 맞춰 알아서 체크하는 것이었고, 모든 문제집은 꼼꼼히 검사되지 않았으므로 절대 들킬 리 없는 계획이었다.


 결국 나는 그의 부탁에 못 이겨 숙제를 보여주었고, 그는 조그만 무릎 위에 내 문제집과 자신의 문제집을 가지런히 펼쳐놓았다. 똑같은 페이지 위에 똑같은 문제. 어느 것엔 흑연 자국이 있었고 어느 것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차이는 불과 몇 분 만에 사라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전략은 정말 제대로 먹혀서, 그날 선생님은 아무 의심 없이 그 학생의 손바닥을 여덟 대 때렸다. 똑같은 답안지를 가져간 나는 다섯 대를 맞았다. 뿌듯했다.


그 뒤로 그 학생이 나의 답안지를 베껴가는 것은 일상이 됐다. 한번 베껴간 답안의 맛이 굉장히 달콤해서 끊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그와 아무 말을 섞지 않고도 눈짓만으로 버스에서 답안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사이가 됐다. 그의 행동은 날로 대담해졌고, 나중엔 잠깐 답안을 베끼는 일조차 귀찮아했다. 그는 간혹 버스 안이 아니라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 강의실에서 빠르게 답안을 베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얼마 가지 못했다. 어느 날 예상보다 강의실에 일찍 들어온 선생님에게 답안을 베끼다 들킨 것이다. 선생님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초록색 박스테이프가 둘둘 말아진 두꺼운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그 학생의 손바닥을 쉴 새 없이 내리치는 선생님의 팔뚝 위 힘줄이 불끈거렸다. 어느 학생도 입을 열지 않는 조용한 교실에 나무 막대와 손바닥 살이 맞닿는 소리만이 교실 모서리에 부딪혀 아우성쳤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 학생의 손바닥이 부르틀 즈음에서야 때리는 소리가 그쳤다. 한참을 훌쩍거리던 그 학생은 수업이 끝날 즈음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동안 그에게 숙제를 보여준 나는 선생님에게 주의를 받았을 뿐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심지어 그날은 다른 학생들 모두, 틀린 문제가 있었음에도 한 대도 맞지 않았다. 모두에게 행복한 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학생은 학원을 관뒀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1년을 더 지냈다. 나는 처음 그에게 숙제를 보여줄 때 이것이 그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 일이 언제가 들킬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했고,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거나 아끼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리어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들키든, 들키지 않든, 무슨 일이 생기든 알 바 아니었다. 그런 과정에서 묘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미소를 지으며 문제집을 건넸고, 그도 미소를 지으며 받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예쁜 미소였다. 우리는 간혹 버스 안에서 대화를 나누며 다른 친구의 생일 선물을 고민하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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