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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선한 양심을 갖는 습관

#무법의 세계에 있었던 양심의 법

by 글탐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행 24:16)
양심은 내가 아는 최상의 것에 마음의 초점을 두는 기능으로서, 사람마다 양심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양심은 영혼의 눈으로서 하나님을 향하거나 스스로 최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향합니다. 만일 내가 꾸준하게 하나님을 뵙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내 양심은 항상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을 소개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합니다. 문제는 내가 순종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어기지 않고 잘 지내려면 나의 양심이 예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된 상태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모든 상황 가운데 마음의 영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365 묵상집 중에서 발췌-

하나님 나라는 무법의 세계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보좌 위에 앉아 하나님 같이 되리라 마음으로 범죄 한 루시엘을 어떻게 심판할 수 있었을까? 그 심판으로 루시엘은 이 땅 가운데 내리 꽂히지 않았는가?


선악과 사건은 명백히 율법의 세계가 드러나니 죄가 드러나고 심판할 수 있는 세계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법이 없는 무법의 나라인데 어떻게 심판이 가능한가?


나에게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난제였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공부를 하던 중에

목사님께서 명쾌한 설명을 해주셨다.


"무법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범죄 한 루시엘을 심판할 수 있었는가?

양심의 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양심의 법에 루시엘은 이미 자신의

반역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라는 것이 드러나고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눈에 보이는 사건으로 그대로 드러난 것이 선악과 사건이고요."


아아~~~ 그렇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양심이라는 것이 있구나!


정말 그랬다.

순수하고 맑고 아무것도 모를 거 같은 아이들도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눈을 가리거나 몰래 숨는다.

아이들이 어떤 분별력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애초에 인간에게 만들어 놓은 양심의 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하면 친밀할수록 양심은 더 예민해진다.

어떤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생각이나 행동은 놀랍게 양심에 찔림으로 먼저 우리를 심판한다.

그 양심의 법에 따라 스스로 돌이키고 그 죄에서 멀어지는 것이 최상일 텐데

우리 인간은 양심에 법을 따라 움직이려는 마음에 애써 합리화를 시킨다.


"에이~ 내가 너무 예민한 거지. 다른 사람들은 더한 것도 하면 살잖아.

어떻게 인간이 이런 생각도 못하고 살아."


하면서 양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외면한다.

그걸 시작으로 우리는 양심의 법에 둔감해지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양심의 통제를 덜 받는다.


그 단계가 더 심해지면 양심에 화인 맞은 자로

어떤 죄를 저질렀어도 내 죄를 인정하지 않고 뻔뻔하게 죄를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킨다.

가끔씩 우리는 밀양이라는 영화에 아이를 납치해서 죽인 범인에 대해 언급한다.

교회를 다니며 겨우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범인이 있는 감옥을 찾은 전도연은

자신은 하나님께 죄 사함 받았다며 뻔뻔하게 구는 범인을 보고 분노한다.

결국 전도연의 분노는 하나님을 향한다. 그렇게 하늘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기까지 하는

안타까운 행동까지 하게 된다.


이쯤에서 과연 그 범인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은 자인가?

양심의 법만 그에게 비춰보더라도 그는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은 자가 아니다.

양심의 법이 그의 마음에 예민하게 잣대를 들이 댔다면

절대 그는 자신이 죽인 어린아이 엄마 앞에서 천인 공로할 표정으로 자신의 죄를 사함 받았으며

자신은 이제 평안하다고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범죄 앞에, 또 그 어미 앞에 무릎을 꿇어 대성통곡하며 사죄했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 양심의 법이 적용된 자의 행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나

진정으로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이다.


양심의 잣대가 예민하게 발동될 때

정말 괴로울 때도 많다.

이렇게 예민하게 피곤하게 살아야 할까 라는 생각도 많이 한다.

하지만 또 생각을 바꾸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양심의 법에 예민한 자는 죄를 범하기 전

죄를 다스릴 수 있을 수 있을 거 같다.


양심에 꺼려지는 것은 무조건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한 오늘의 묵상글인 거 같다.

이 묵상글이 참으로 부담이 되는 것을 보면,

내면의 거리낌이 있는 거 같다.


"오~ 오늘도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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