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통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얻기 위해 십자가를 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 한 가지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절대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 됨은 그 어떤 것보다 기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365 묵상집 중에서 발췌-
"왜 그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라고 생각해?"
어느 날, 믿음의 자매와 교제를 하는 가운데,
자매가 하나님께 서운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자 내가 직구를 던지며 한 말이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잘 들으시는 거 같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하나도 이루어주시지 않아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잘 안 된 모양이다.
그걸 붙잡고 새벽기도까지 하며 열심히 기도했는데 결과는 자신이 원하던 방향과
정 반대 방향으로 나왔으니 당연히 하나님께 섭섭할 법도 했다.
처음에는 공감해주고 이해해줬는데 그러다 보니, 내가 그 섭섭함에 더 기름 부어주는 거 같아
조금 냉정해져야겠다고 생각하며 던진 말이었다.
"안 되는 게 하나님 응답이라고는 생각 안 해봤어?"
그러자 자매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얘기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봤다.
"아, 그 생각까지는 못해봤어요."
나는 나의 경험을 나누었다.
과거,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쓰기 시작한 드라마가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시청률이 나오지 않자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내 고정된 생각의 틀 안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엄청나게 잘 될 거야!"라는 아주 강력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드라마를 집필했다. 드라마를 집필하는 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은 참으로 드라마틱했지만, 이 상황을 지면에 소개할 수는 없고, 어찌 됐든 내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결과와 다르게 드라마를 쓰는 시간은 지난한 시간과 결과들로 가득했다.
드라마가 끝난 이후에도 나는 그 후유증을 앓았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었다.
'말이 되는가? 그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오만함이라니!'
어찌 됐든 그때 그 당시에 나는 하나님께 삐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하나님과 쌓아 올린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예배는 참석했다.
예배는 형식적이었고, 나는 점점 외식하는 자처럼, 그저 몸만 왔다 갔다 하는
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누군가 나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터져버릴 거 같은 분노를
안에 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누르고 누르던 하나님께 섭섭했던 마음을 기도로 토설하며
하나님께 덤벼들었다. 있는 힘껏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대며 따지듯 기도했다.
"가라 하셨잖아요. 허락하신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결과가 엉망진창이잖아요? 이러실 거면 왜 저를 보내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끔찍하고 오만방자한 기도였다.
하지만 미성숙한 단계에서의 기도라 하나님께서는 이 마저도 기뻐하시며 내 기도에 답변하셨다.
"네가 생각하는 결과와 내가 생각하는 결과가 다르다. 그럼에도 이것은 내 응답이고 내 뜻이다."
처음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참으로 다시 고백하건대 어리숙했던 나날들이었다.
어찌 됐든, 이런 시간들 끝에 나는 다시 주님 앞에 무릎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길 소망하는 자가 됐다.
우리의 기도의 목적과 하나님의 기도의 목적은 극과 극의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그 목적을 일치시켜나가는 과정이 기도의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목적을 중심으로 두고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 됨이 어려워진다.
기도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영적인 기도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성경 속에 담긴 기도들을 알아보고, 그 기도의 원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도 접목됨을
알아야 한다. 알고, 믿고 하는 기도가 되어야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