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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Jan 30. 2021

그렇게 우린, 잘렸다

하루살이의 오늘

잠깐 북 디자이너로 일을 할 때였다. 그날도 면접 자리에서 합격이 되었고 어쩌다 같이 밥까지 먹게 되었다. 대표는 자신을 OOO의 오빠라고 소개했다. 친하지 않았던 같은 과 동기였는데 안물안궁, TMI였다. 그 덕에 합격이 됐고 점심을 대접받았다는 생각은 1도 없었다. 금수저를 입에 문 어린 대표보다 까칠하기가 철수세미와 같던 이사의 입김이 더 센 회사 같았기에. 어쨌든 꽁꽁 얼어붙은 채로 힘겹게 한 그릇을 싹싹 비워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  


모든 게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는 회사에서는 좋은 디자인도, 훌륭한 디자이너도 나올 수 없다며 정식으로 입사하기 전 날 오로지 컴퓨터 세팅을 위해 출근했다. 팀장과 대리, 사원이 모두 같은 날 세팅을 했고 다음 날 동시에 입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세팅을 마치고 우린 간단히 뒤풀이를 했다. 첫 만남에 쿵짝이 참 잘도 맞았다.



상명하복을 어긴 죄


대표의 꿈(영화 제작)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사가 끊임없이 돈(북디자인)을 벌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폰트만 써야 했다. 특정 폰트가 필요할 때는,


1. 이사가 일하고 있는 방으로 이동한다.

2. 이사가 쓰고 있는 컴퓨터를 잠깐 빌린다.(옆에서 지켜보고 있음)

3. 폰트를 그림 파일로 변환한 후 다시 내 컴퓨터로 전송한다.


몇 번을 들락날락하다 이렇게는 도저히 못하겠다, 싶어 팀장이 먼저 자신의 외장하드에 담긴 폰트들을 컴퓨터에 깔았다. 그다음으로 내가 다 깔았을 때는 이미 퇴근 시간이 되어 사원 한 명은 내일 깔기로 하고 오늘의 결과물들을 이사에게 컨펌받으러 갔다. 이사는 제일 먼저 팀장과 내가 사용한 폰트의 출처를 물었다. 팀장이 이래저래 해서 그렇게 됐다! 고 말하자 그냥 너희 둘은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 며 그 자리에서 바로 잘렸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운 좋게 살아남은 한 명의 직원을 뒤로하고 우린 다시 술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잘린 것도 처음이지만, 잘리고 나서 이렇게 웃긴 것도 처음이었다. 장담하건대 오늘이 아니었어도 빠른 시일 내에 어떻게든 잘렸으리라.


그러니 너도나도 쿨하게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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