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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Jan 08. 2021

악마는 프라다만 입었다

패알못의 패션잡지 에디터 되기

대표의 부탁이었다. 홍보팀에서 썼던 것처럼만 해달라고. 그런 감성이 필요하다고. 관련 업계도 아닌 회사에서 돌연 패션잡지를 만들었고 언젠가 대표님을 취재하러 왔던 한 잡지사의 에디터는 전공자(경력자)라는 이유로 편집장이 되었다. 그리고 패션잡지 속 '패션'을 1도 이해할 수 없었던 보통 사람은 어쩌다 패션 잡지의 에디터가 되었다.


편집장, 영업차장, 에디터 둘로 이뤄진 우리 팀은 가로수길의 폼 나는 카페에서만 회의를 했다. 기획회의, 마감회의, 평가회의 등등의 수많은 회의 덕분에 곳곳을 참 많이도 다녔다.(편집장 제1의 권한은 회의 장소 사전 답사 및 셀렉이었을지도...)


20대 여자 직원들은 편집장의 패션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패션잡지 속, 런웨이 속의 옷들을 실제로 입고 다녔다. 현실에서도 입을 수 있는 옷이란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여자 직원들의 찬사에 부응하듯 편집장의 옷은 날로 과감해졌다. 우리(에디터)의 옷이 초라하게 느껴진 건 그즈음이었다.

회사 내에서 원고와 싸움하는 날이 많은 우리에 반해 편집장은 매일 어디론가 사라졌다. 영업 때문이었겠지 싶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옷은 '일하기 편한' 복장이어야 했다. 그렇다고 패션 테러리스트까지는 아니었는데. 기가 막히는 타이밍에 대표님의 호출이 있었다.


패션잡지를 만드는 팀이니 만큼, 다른 팀에서 보았을 때도 우월하게 옷을 잘 입어 줬으면 좋겠다는 편집장의 요구가 있었단다. 언제 한번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줄까?라는 대표의 말에 우리 둘은 머리를 숙였다. 죄인처럼. 그게 아니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드라마 <스타일> 속 인물들의 '옷'을 눈여겨보라며. 그 영화와 드라마를 봤을 리 없는 대표의 말은 당연 편집장으로부터 나왔겠지.


영화는 영화일 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실제로 패션 에디터는 옷을 그렇게 입나? 현실을 알리 없는 난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나 다시 돌아갈래


패션 지적 이후로 서먹해진 관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이전부터도 안사람들과는 겸상을 하지 않던 분이 울먹이며 대표를 찾았고 우리는 또다시 불려 갔다. 왜 둘만 어울리고 편집장을 따돌리냐고. 그 일 때문이냐고. 어디 우리가 편집장을 따돌릴 군번인가요. 그녀가 선택한 길이지요.


편집장은 전체 페이지 구성부터 화보, 광고, 영업, 인쇄 등 혼자 해야만 했던 일들이 꽤나 많았다. 관련 업계 종사자로는 유일했으니. 그 모든 능력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딱 하나! 그건 사실 대표도 알고 있었고 이해해 주라는 부탁도 있었다.


그녀는 패션 관련 용어들은 빠삭했다. 그걸로 끝! 글을 너무 못 썼다. 편집장의 말부터 메인 화보, 메인 인터뷰 기사 등 몇 개 되지 않는 글들이 오류 투성이었다. 어차피 니 이름으로 나가는 거니까요. 창피함도 니 몫, 이라 여겼다. 하지만 잡지에 실린 모든 글을 책임지고 싶어 하던 편집장은 우리 글에 한해 교정에 늘 진심이었다.

한 예로 내 기사 중에 '역전 앞에서'라고 쓴 글이 오류인 걸 교정 과정에서 확인하고 '역전에서'로 고쳤는데 마지막 화면 교정에서는 다시 원래대로 '역전 앞에서'로 되어 있었다. 편집장은 '원래 썼던 게' 나은 것 같아 바꿨다고, 했다. 그게 '나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못된'거라 이야기하는데. 아 그런데 왜 설득을 해야 하지?


우여곡절 끝에 원래 있던 팀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내 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직원에게 인수인계를 하라는데, 웬걸! 그 사람의 의견이 빠져 있었다. 편집장에 대해 모르면 모를까, 알고는 못 들어가겠다! 며 억지로 가야 한다면 퇴사를 하겠다는 그 사람에게 난 뭐라 말해야 할까. 노약자석도 아니고.


저 다음 역에 내려요. 그냥 앉아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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