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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Jan 06. 2021

가족같은 회사

나만 몰랐던 이야기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면접관이었다. 자신을 실장이라고 소개한 남자 1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가족 같은 회사라서 이런저런 장점들이 많다!   

입사를 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다들 알면서도 쉬쉬하는 분위기라...)

가족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짜 가족이었다. 대표(아버지), 이사(어머니), 실장(아들), 총무(며느리)를 비롯해 상무, 각 팀의 팀장 모두 친인척이었다. 이하 직원들만 면접이란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었는데 그중에도 학연, 지연으로 이어진 직원들이 꽤 있었다. 생판 남인 사람은 나뿐인가 싶을 정도였다.


입사 첫날, 같은 팀의 디자이너라고 소개해 준 사람도 면접관 중의 한 명이었다. 대리도, 팀장도 아닌 그냥 직원이 면접관이라니. 꽤나 깨어 있는 회사라 생각했다. 나와 디자이너, 사진작가 이렇게 셋이 이번에 새로 꾸려진 '전략기획팀'의 팀원이었다.



팀이 해체되다  


대기업으로 따지면 상위 1%에 속하는 팀명에 은근 기대도 했다. 그런데 현실은...? 회사의 제품을 다양하게 홍보할 수 있는 웹진을 만들면 된다는 말뿐. 그 어떤 관련 문서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군가 아이템을 제안했고 또 누군가 즉흥적으로 진행했던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모든 준비가 끝나고 실행을 해야 하는데 3개월이 넘도록 일러스트를 담당할 디자이너가 뽑히질 않았다.


사실 일러스트가 뽑히지 않은 게 아니라 뽑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셋이 어떻게든 해보겠지!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제품 상세페이지 디자이너에게 웹진 전체를 맡겼으니 성에 찰 리가 없었다. 디자인 시안을 선보일 때마다 다시, 다시! 만 외쳐대던 분도 딱히 대안은 없었다. 모두가 웹진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종무식을 겸한 워크숍에서 우리는 팀의 해체 소식을 들었다. 성격 급한 누군가가 더는 못 기다려 해체를 명했으리라, 예상했다. 급하게 꾸려진 팀에게 주어진 기한은 고작 3개월이었다. 그래도 회산데? 팀을 만들었는데? 사람을 뽑았는데? 실행도 못해봤는데? 말할 사람도 없지만 답해 줄 사람도 없었다. 두 명은 원래 있던 팀으로 돌아갔고 나는 제품기획팀으로 배치됐다.       



복사하기 싫다


새로운 제품을 기획, 제작하는 이 팀은 하나부터 열까지 대표가 직접 관리했다.

마침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제품 소개 글만 남은 상태였다. 분 간격으로 진행 과정을 확인하던 대표는 결국 나를 본인 자리로 소환했다. 전략기획팀에 있는 동안에도 저런 뻔한 글은 대체 누가 썼을까?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답을 찾았다. 비슷한 제품들의 소개글을 이곳저곳에서 한 문장씩 모아, 모아서 적은 쪽지를 주셨다. 다 줬으니 잘 다듬어보렴. 세상 경멸하는 '복사하기'였다. 누군가는 벤치마킹이라고도 한다. 잘 닦아 놓은 길로 빨리 가야 따라잡을 날도 온단다. 어르신께는 그게 맞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글쎄요, 아직!

누가 그렇게 제품 상세 페이지 문구에 관심을 갖겠냐만 그래도 동종업계 사람들은 알지 않을까. 저 문구는 우리가 처음 쓴 건데? 저 업체에서 베꼈네? 알 텐데. 양심에 찔린다기보다는 그냥 엄청 쪽팔린 거다. 베껴 쓰는 거 자체가.


뻔한 말을 포장하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피드백은 예상대로였다. 이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닌데. 다음부터는 내가 준 걸 그냥 정리만 한다는 느낌으로 써라. 빨리 올리는 게 중요하니까.


대표님. 그건 꼭 제가 아니어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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