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문화권에서 자란 아이 I

공부아닌생각 #6

by 기비메이어


"아, 나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랐어."




누군가 내게 종교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매번 하는 대답이다.

그리고 필히 이어질 질문이 나오기 전에 나는 다음 같이 대답을 고친다.



"가족이 다 개신교야. 엄마, 아빠, 외가댁, 친가댁, 사촌들 전부 다."


"근데 나는 별로 안 믿어"


"또 뭐. 살다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분명 어렸을 때는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보다 좀 더 컸을 때는 무교라고 말했다. 그런데 요즘은 누가 내게 종교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냥 기독교문화권에서 자랐다고 대답을 한다. '기독교인이야.' '무교야.' 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기에 언제부턴가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나름대로 오랫동안의 고민 끝에 고안해낸 대답이다.






< 교회 >



크리스천이라 하기에는 교회가 싫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미웠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모태신앙이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녀야 했고, 주말마다 차로 수십분 떨어져있는 곳에서 반나절을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나의 주말을 뺏는 교회가 미웠다.



더 큰 문제는 할아버지가 설립하신 교회라는 이유로 나는 다른 교회를 다닐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나도 큰 교회를 다니고 싶어.' '큰 교회는 겨울에 스키장도 놀러간대.' 같은 말을 해본 적이 있으나, 가족이라면 모름지기 가족의 교회를 다녀야한다는 이유로, 자고로 신앙이란 장소와 무관히 마음에 달려있다는 이유로,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항상 교회가 미웠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명백하게 어린이었던 나의 시절에 나는 교회를 좋아했다.



교회의 존재는 좁디 좁은 어린이의 세계관이 좀 더 넓어질 수 있었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주로 놀이터에서 놀았다면, 교회 동네에서는 뒷산에서 놀았다. 산 중턱 즘에 있던 주인 모를 무덤에서 썰매를 탔고, 거지 아저씨가 산다는 판자집에 담력 체험을 한답시고 함부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주인 아저씨가 병나발을 들고 소리를 지르면 우리는 다 같이 깔깔 거리며 도망을 갔다. 가끔은 고약했지만 순수했고, 그랬기에 나는 교회를 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이 으레 처하게 되는 내부 정치적인 문제들을 겪고, 대형 교회들 틈 사이 숨통이 조여오면서, 할아버지의 교회도 쇠락의 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시대의 흐름이 교회를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버틸 자본이 부족한 작은 교회들부터가 죽어 나가는 것이 순리상 불가피했다.


쇠락하는 교회는 어린이들이 떠나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교회의 흥망여부를 알고 싶으면 청년부 예배가 몇 부까지 있는지, 또는 청년부 예배가 있기나 한 것인지를 확인해보면 된다. 어린이가 없는 교회는 희망이 없으며, 늙은 이들이 채운 예배당에는 독기가 가득하다. 목사님의 설교에는 따뜻함이 없고 공허한 열정 만이 남아있다.


그러한 열정은 주로 막무가내 식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그리스도 덕입니다."와 같은 정언명제를 남발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따뜻함을 잃어버린 교회는 젊은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그렇게 악순환은 이어진다. 어떤 면에서는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과 다르지 않아보이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작은 성전도 그렇게 빠르게 무너져내려갔고, 어린 시절을 같이했던 내 친구들은 엄마 아빠를 따라 교회를 떠났다. 그럼에도 오직 나만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다. 청년부는 없어졌고, 또래라 하면 매번 50,000원 씩 받고 반주를 해주는 반주자 한 명 뿐이 다였다. 나이가 들어 교회를 옮겨다닐 기력 조차도 남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들 만이 관성에 따라 예배당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교회를 망하게 내버려둔 어른들이 미웠고, 그럼에도 주일마다 문을 여는 교회가 미웠지만, 다른 교회를 가지 못하게 하는 아빠가 밉지는 않았다.


언젠가 한 번은 이를 악물고, 할아버지의 교회에 가기 싫다고, 나도 이제는 다른 큰 교회에 가보고 싶다고, 윽박을 지른 적이 있었다. 교회를 가봤자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 밖에 없는데. 일요일 아침을 퀘퀘한 장소에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어라 시원하게 한 마디 질러놓고서는, 반항하는 아들에게 화를 낼 아빠의 다음 순간을 기다리며 침을 꼴딱 삼켰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아빠의 반응에 나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아빠라고 가고 싶겠니.


할아버지가 외로우신데. 그래도 가족으로서의 도리를 하나 해야한다면 우리가 교회를 가는게 맞지 않겠니."



차라리 화를 냈다면 나도 씩씩 거리면서 저항했을 텐데. 언젠가 뱉었던 나의 투정에 슬픈 표정으로 체념하듯이 대답했던 아빠의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아, 그 이후로도 나는 다른 교회를 가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후 나는 가족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되었다. 크리스쳔이 아닌데 church goer 인 사람을 손에 꼽으면 전세계에 나 포함 몇 명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일에 교회를 가는 행위는 루틴이 되었으며, 부모님의, 더 나아가 조부모의 녹을 먹고 자란 나에게 숙제와 같은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분노하는 편 보다 체념하는 것이 살기 편했다.




...II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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