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기다림

by 기비메이어


괜찮다올해안되었으니내년에는잘하면된다.아멘할렐루야하나님도와주세요새해에는반드시合格을기원합니다.축복감사사랑만세만세기백장수부탁드립니다.祖父는懇切히祝福하고祝願함니다하나님도와주세懇切히祈禱하면서더큰榮光돌이기爲해서懇切懇谷禱告祝禱함니다Amen



매주 할아버지가 보내시던 장문의 메시지.

쉴새없이 몰아치는 듯한 할아버지의 카톡 기도.


아마 띄어쓰기를 할 줄 모르셔서 그런거겠지만.



< 긴 호흡의 암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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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할아버지는 부쩍 카톡이 늘으셨다.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어있는 일가친척과 지인들에게 “오늘은 월요일입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따위의 문구와 함께 반짝반짝 꽃그림이 그려진, 촌스러운 시니어디지털교육센터 발 움짤들을 쭉 돌리고 나면 당신의 하루가 시작된다.


그런데 개중에도 진정으로 기도가 필요하리라 판단이 서는 몇몇 이에게는, 할아버지가 특별히 손수 작성하신, 띄어쓰기가 없어 호흡이 긴, 그런 장문의 카톡을 보내신다.


그래서 내 수험생활 5년 동안, 할아버지는 매주 또는 격주에 한 번씩 내게 띄어쓰기가 없는 긴 기도문을 톡으로 보내주시고는 했다. 어떻게 하시는 건지 국한문과 영문까지 혼용해서 말이다.


나에게 한자는 어렸을 적 구몬 학습 때 배운 게 전부였지만, 할아버지의 카톡 레파토리가 매번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때로는 암호문이나 스팸문자처럼 보이는 긴 문장들을 이해하는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축복, 기도, 만세, 장수, 간절, 시험, 합격, 기원, 평화...


이런 단어들이 동일한 레파토리로 반복되었기에 한자를 몰라도 맥락 상 대충 때려맞힐 수가 있었다. 한번은 친구에게, “우리 할아버지는 백 세 가까이 되셔서 카톡도 할 줄 아신다?” 하며, 눈 앞에서 할아버지의 장문 톡을 읽어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친구는 '네가 한자를 이렇게 잘 알았냐'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뭐~ 아는거지.“ 하며 상식 수준이 높은 사람인 체를 했지만, 실은 같은 내용의 문장을 벌써 수십차례 받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할아버지의 장문 카톡은 나만이 알아 볼 수 있는 암호문과 같이 되어버렸다. 허술한 맞춤법, 띄어쓰기의 부재, 한자단어의 남용, 척척박사도 난독증으로 만들 수준으로 난해한 할아버지의 카톡 기도.





<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필연적인 기다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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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렸을 적 기억의 할아버지는 가히 비범하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20년대 생 치고 큰 체격. 사시사철 변함없이 유지되는 올백머리. 두껍고 각진 눈썹 아래로 쓰고 다니시는 누런 틴트 안경(어렸을 때는 선글라스인 줄 알았다.)


민간인보다는 직업군인에 가까운 이미지었으나, 실제로는 목사님이었다. 하루는 "제5공화국"이라는 드라마에 나온 무서운 대머리 아저씨를 보고 할아버지 닮은 사람 나왔다고 말했다가 아빠에게 크게 혼난 적도 있었다.


비범하기도 하지만, 무서운 할아버지기도 했다. 음식점, 목욕탕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실랑이가 붙어 20년은 더 젊은 아저씨들과 소리를 지르며 싸우시는 일이 왕왕 있었고, 그때마다 말리는 사람은 할머니나 자식들이었다.


그랬던 할아버지었지만 할머니가 병상에 눕고나서, 그리고 회복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고 나서부터는 그 비범함이 바래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죽음이 오래토록 기억에 남는 이유를 대자면 여럿 있겠지만, 그 중 하나를 말하자면 죽음이 기다림을 의식하는 끝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고령의 나이에 무리하여 항암 치료를 하셨고, 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남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두의 동의로 인해 치료를 중단하고 요양병원으로 옮기셨다.


“부름 받으신다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가 없었기에 모두가 마음의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한 표현이 거북하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지만, 끝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황을 또다른 희망적 기다림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사고방식이라고, 언젠가부터 생각을 고치게되었다.


아무튼간에, 할아버지가 어떻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필연적인- 기다림을 인내하셨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나라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고, 6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했던 동반자의 죽음을 기다리기에는 차라리 같이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이렇게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상황임에도 나약한 인간은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미 앞의 설명에서도 드러났겠지만, 할아버지는 이성적이면서도 자상할 줄 아는, 인자한 호호 할아버지와는 거리가 먼 노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다림에 초연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울기도 울었고, 애꿎은 병원 직원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억지부리는 일도 잦았으며, 교회를 찾아오는 약쟁이들의 꼬드김을 이기지 못하여 신비의 영약들을 비싼 값을 치르고 구매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독특하게도, 도교의 "기"와 기독교의 "기도" 라는 개념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대 어르신들이 대개 그랬을지도 모른다), 늘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도, 만물에 흐르는 영적 에너지와의 교감을 중시하셨다.


기가 세야 장수한다면서 기백을 세우기 위한 기합을 지르고는 하셨지만, 실은 호통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할머니가 병상에 누우시고 나서는 할아버지의 통성기도와 기합소리에 병실이 자주 소란스러워지고는 했다.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는 간절함의 표현이었을지도 몰랐으나, 암세포에는 도덕이랄게 없었으며 종교도 없었다. 그저 독한 항암치료를 잘 견뎌낼 뿐이었다. 오직 사람만이 치료를 견디지 못했고 말이다.


남은 한 풀의 희망을 가지고 뻗댈 수록 꺾이는 것은 필연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뚜렷히 보여지는 징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건 비범한 나의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었다.



< 필연적 기다림의 끝 >


특이할 점은, 할머니의 임종 이후, 할아버지의 눈빛이 다시 기력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이는 할머니의 발인 전까지 지속되었는데,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뤄야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기다림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목적 있는 삶인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눈빛만큼은 강하게 살아있던 것이 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든 장례의 절차를 마치고 나서는, 할아버지는 다시 그 전의 흐리멍덩한 눈빛을 하시고는 본가의 방안으로 들어가 잘 나오지 않으셨다.


'쓸쓸하시겠다.'

'나라면 다시 그 방으로는 들어가지 못 할 것 같아.'


장례 이후 자택의 안방에 들어가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이다. 둘이 쓰던 돌침대를 차라리 이제는 팔아버리고 좀 더 작은 침대로 바꾸면 낫지 않겠거니 싶었는데. 나이 든 노인의 관성 때문인지, 아니면 별 신경이 쓰이지 않으셨던 것인지, 돌침대를 포함하여 십 몇년이 넘는 기간동안 안방은 같은 모습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게 남은 것들 중 특히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다. 할머니가 아프시던 기간에 할아버지가 작성해놓은 것들. 달력에 적혀있는 할머니의 항암치료 날짜, 병실 이동 날짜, 무슨무슨 치료날짜. "God Help me" "하나님 도와주세요." 같은 문구가 작성된 이면지들. 벽 여기저기에 붙여놓은 할머니의 사진과 기도문.


이러한 것들은 할머니의 임종 이후에도 계속 그 자리에 남아 그 당시의 절실했던 기다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기다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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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3년 즘 지난 이후, 나는 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고시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할지 잘 알고 있었기에, 친척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까운 가족들만 알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몇 개월만에 끝나는 시험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참으로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출사표를 던지고 나서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내가 "입신양명"하기 위해 무언가 부단히 시도중이라는 사실이 할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갔다. 예상했던 반응대로 할아버지는 굉장히 뜨거운 기도를 해주셨고, 또 열심히 내게 기합을 불어넣어주셨다. 비대한 자의식이 가져온 내 착각일 가능성이 높지만, 순간 할아버지의 눈빛에서 다시 무언가 뜨거운 것을 보았던 것 같기도하다.


이후 할아버지 집에 있는 달력에는 나에 대한 표식들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달력에 거칠게 동그라미 쳐져있는 D-day들. 1차 시험, 2차 시험, 3차 시험 일자 및 발표일자. 하나님 도와주세요. OO이 합격기원합니다.라는 거친 글자들.


이렇게 눈에 띄게 보이는 할아버지의 간절함이 감사했으나, 어떨 때는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냥 내가 이 직업을 가지고 싶어서 미련하게 공부를 계속할 뿐인데, 뭐가 그렇게 기쁠 일이라고 힘을 들여 나를 기다리시는 건지.


빨간색 또는 검정색 매직으로 두텁게 적혀있는 나를 위한 글자들이, 예전 할머니의 수술 날짜 또는 항암치료 날짜 옆에 간곡하게 적혀 있던 기도문과 겹쳐보였다. 당연하게도 간절함의 정도는 차원이 다르겠지만, 어찌됐든간 나의 공부와 합격이 할아버지에게는 어떠한 기다림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는 결이 매우 상반된 것이지만, 어찌됐든간에 기다림이라는 것들이 그러했다. 달력에 표시되어 있음으로써 해당 날짜와의 거리감에 따라 오늘과 내일에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기다림이 절박함으로 이어지고, 그러한 절박함이 삶에 대한 의지로 이어질 수 있다면, 약간의 부담감을 짊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나의 합격은 필연적이지 않은 기다림이라는 것이 걱정이었다.





< 합격의 의미 >


격주에 한 번 정도, 나는 교회 옆 사택에 있는 할아버지의 집에 방문하고는 했다. 교회를 가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보다는 할아버지를 뵈러가는 일에 가까웠다. 일주일에 하루뿐이 되지 않는 휴일의 일부를 할애해서 그다지 기껍지 않은 교회로 가는 이유는, 특별히 할아버지를 너무 사랑해서는 아니었고, 다만 할아버지의 기도와 기다림에 대한 나만의 대답인 셈이었다.


첫 두 번의 불합격 통보 때는, 할아버지가 눈물이 맺혀있는 붉은 눈을 하시면서 큰 소리를 치셨다. 나를 혼내신 것은 아니었고, 그런 식으로 소리를 치면서 정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할아버지가 기백을 유지하시는 방법이었다.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손자가 시험에 낙방하는 것이 충격이셨나보다. 고시가 어떤 시험인지 아마 잘 아시면서도.


세 번째 네 번째 불합격 통보 때는, "그러냐?"하면서 무던한 반응을 보이셨고, 대신 긴 카톡 문자로 말을 대신하셨다. 그 사이에 노쇠해져서 그러셨던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몇 번의 기다림이 부응받지 못하자 기대를 져버리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반응들이 이어지자, 나는 합격통보를 받으실 할아버지의 반응을 상상하고는 했다. 달력에 빨간팬으로 두텁게 친 동그라미의 갯수처럼, 그만큼 좋아하시겠지. 빨간 동그라미 마냥 눈이 부어오르신 상태로 쉰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실 할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대했다. 그런 가학적인 상상을 하며 히쭉거렸던 내 모습이 좀 변태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올해 합격 발표를 받고나서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OO 이번에 합격했대요. 허허허."


"할아버지, 저 시험 붙었어요!"


그런데 나는 과연 뭘 그렇게 기대했던걸까. '어야, 그러냐! 축하한다!' 와 이어지는 두 세 마디의 담백한 축하를 받았지만, 내가 상상하던 폭발하는 감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근래 들어 할아버지 주변으로 산적한 슬픔과 어려움이 많았기에, 나의 합격이 뭐 그리 대단한 효과를 주지는 못 했던 것이다. 달력에 점철된 동그라미로는 읽을 수 없는, 기다림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그런 영속적인 고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근본적인 고민들에 비하자면, 나의 시험 합격은 일종의 즐거운 단발성 이벤트에 불과했다. 그러한 이벤트는 매우 기다려지는 것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끝나고 나면 그 뿐인 것이었다.


내가 합격하면 집안에 대단한 행복을 가져올 수 있을 것 마냥 착각을 했던 게 부끄럽기도 했다. 나의 비대한 자의식을 여기저기 알리고 다니던 것은 아니었음에도 그런 유치한 생각을 몇 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내 자신이 민망했다.


사실 생각해보니, 할아버지의 기다림은 나만이 대상이 아니었다. 몇 년 전 변시에 합격한 사촌, 애를 둘이나 낳은 사촌, 외국에서 유학 중인 사촌...고시라는 시험의 이름값이 크기에 할아버지의 달력에서 유독 큰 존재감을 보였을 뿐이지, 할아버지의 기다림의 대상이 되는 단발성 이벤트들은 여럿 있었고, 앞으로도 많이 남아있었다.




< 기다림 자체의 의미 >



아무튼간 몇 주 정도가 지난 뒤였다.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 식사 기도를 할 때면 모두가 눈을 감고 할아버지의 기도를 듣는다. 사실은 기도라기보다는 할아버지의 희망사항을 그 자리의 모두가 듣도록 발화하는 가족 행사에 가깝다. 그런식으로 가족의 서열 순서대로 기도를 쭉 읊고 나서, 거의 끝머리 즘에 나에 대한 기도 차례가 돌아왔다.


"우리 OO이는, 하버드 유학해서 박사따고, 외교부장관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멘."


해본 적도 없는 생각이 할아버지의 입을 빌려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장차관을 하고 싶은지도, 아니 애초에 공직에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능성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빈 말을 하시는 법이 없는 할아버지의 기도가 이루어지려면 최소 20년은 있어야되는 것으로 보이니 할아버지가 기다릴 수 있는 범주의 기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슬쩍 곁눈질해 쳐다본 할아버지의 눈빛이 유독 뜨겁게 빛나는 것 처럼 보였기에, 나도 그냥 끄덕거리면서 '아멘'을 했다. 할아버지의 기다림은 단순히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면서.




멋지고성공한외무부미래장관되기를懇切히懇谷히祝福祝願祝禱함니다Amen祝賀하며祈禱한.다하나님께榮光父母에恩惠感謝祈禱면서熱心히勞力하기바란다Amen.



그렇게 요즘도, 예전에 비해서는 그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나는 할아버지로 부터 장문의 카톡메시지를 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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