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대개 불확실하다. 오래된 일일수록 더 그렇다. 당장 어제 한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당에 10년 전, 20년 전 일을 기억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찌어찌 고막 깊숙한 곳에서 귀지를 파내듯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냈다고 치자. 어렴풋한 그 기억이 사실과 일치하는지 100% 확신할 수 있을까. 머릿속 기억이 밀랍이 아닌 이상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십중팔구 원래 이야기에 살을 붙였거나, 아예 한 귀퉁이를 뭉텅 잘라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기억을 편집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언제부터 PD가 되고 싶었을까. 처음에는 초등학생 때 플랜 A의 싹이 튼 줄 알았다. 놀이터에서 노느라 손에 묻은 흙도 닦지 않고, 두 다리를 TV장에 걸친 채 저녁 연속극을 보면서, PD의 꿈을 키운 걸로 기억했다. 당시 내게 연속극은 밀레의 <만종> 속 부부가 해질 녘 종소리를 들으며 올리는 기도와 같았다. 연속극의 시그널 음악은 만종의 종소리였고, 주인공을 응원하며 나도 모르게 모은 두 손은 만종의 삼종기도였다. 일종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었던 셈이다. 적어도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기 전까진 이게 플랜 A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초등학생 당시의 기록 어디에서도 PD라는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일기장을 전수 조사했지만 헛수고였다.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나눠줬던 일기장에는 장래희망을 적는 란이 있었는데, 대부분 빈칸으로 남겨져 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시대를 앞서 열린 결말을 지향했던 것 같다. 다만 4학년과 5학년 때만 대통령이라고 쓰여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IMF 사태로 대국민 특별담화를 발표하기 전이었다.
장래희망 란에 PD라고 적힌 최초의 기록은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일관되게 PD라고 적혀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한국 드라마의 전성기였다. 도지원이 <여인천하>에서 표독스러운 연기로 열연한 것은 물론, “뭬야?”는 전국 초등학생들의 인사말이 되었고, 욘사마 배용준이 <겨울연가>로 일본 열도를 들썩거리게 한 덕에 무명에 가까웠던 남이섬은 일본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이 같은 절정의 인기에 힘입어 <올인>이 미국 현지 로케이션 촬영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호강시켜 줬을 뿐 아니라, 해외 로케이션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당시 내 드라마 사랑은 대입의 불안감 따위는 가볍게 불식시킬 정도였다. 다소 호들갑스럽게 고백하자면, 드라마 <올인> 마지막 회를 보기 위해 야자를 빼먹었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틀림없다. 이병헌이 송혜교를 와락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 가운데, 이를 카메라가 둥글게 돌며 촬영한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당시에는 이런 트래킹 샷이 드라마 마지막 회를 수놓았다. 수능이 불과 일곱 달 남은 때였다. <올인>은 내 인생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청소년에게 ‘인생은 한 방’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을 준 것이다. 물론 이제는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고 믿고 있다. 한마디로 드라마 키즈였던 것이다.
이러한 드라마 사랑이 자연스럽게 장래희망으로 연결됐다. 짐작하건대 고1은 더 이상 대통령을 장래희망으로 적어 내기엔 겸연쩍은 나이고, 온 우주의 도움을 받아도 대통령이 될까 말까 하다는 걸 알 만한 나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PD는 오를 수 있는 나무처럼 보였다. 적어도 고등학생 눈에는. 6년 후 방송사 공채에서 처참히 광탈할지 까맣게 모른 채, 열아홉 살의 나는 언론정보학부에 진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