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명동이었는지 종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분명한 건 인파가 넘쳤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저 기차놀이를 하듯 앞사람의 꽁무니만 쫓았다. 한참 동안이나 거북이걸음으로 이동하다가 겨우 인파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골목에 멈춰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제야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감이 잡혔다.
SBS 면접에서 떨어지고 나서 꼭 그랬다. 본격적으로 PD 준비를 한지 넉 달째 자기소개서와 입사원서를 처음 썼고, 다섯 달째 서류전형과 필기전형에 연달아 붙고, 여섯 달째 처음으로 탈락을 맛봤다. 여섯 달 동안 인파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앞사람 꽁무니만 쫓다가 골목으로 툭 떨어져 나온 기분이었다. 한 걸음 떨어져 인파를 바라보니, 무리 속에 있던 경쟁자들의 면면이 보였다. 그들은 얼치기인 내가 감히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아이돌 멤버와 노래는 물론이고 그 역사까지 줄줄 꿰는 아이돌 박사, 듣도 보도 못한 제3세계 음악까지 섭렵한 배순탁급 음악 애호가, 유럽 축구 경기를 직관으로 챙겨보는 것도 모자라 현지에서 심판 자격증까지 취득한 축구 준전문가까지 모두 덕후 그 자체였다.
심지어 PD 지망생이 아닌 PD로 살겠다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PD를 흉내 내고 다니는 선배도 있었다. 웃고 넘길 일이 아닌 게, 그분은 자못 진지했다. 미디어 학도답게 마셜 맥루한의 명제를 몸소 실천한 게 아닌가 싶다. 미디어 학도가 아니더라도 “미디어(형식)가 다르면 메시지(내용)도 달라진다”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구태여 다시 설명을 하자면, 미디어 그 자체가 메시지와 관계없이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다는 것이다. 그 선배는 외양(형식)을 바꿔 궁극적으로 자신은 물론, 사람들이 자신을 PD로 인식하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이러한 판국에 소싯적에 만화를 보느라 밤을 새운 치들은 덕후 축에도 끼지 못했다. 입이 벌어질 만큼 더 놀라운 건 덕후들도 PD 최종 관문에서 미끄러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막막했다. 그래도 방송국 놈들이 어떤 부류의 인간을 선호하는지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덕후가 되려면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기도 전부터 장애물에 부딪혔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성향은 타고난다고 믿는데, 나는 덕후처럼 무언가에 꽂혀 한우물만 파는 위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너럴리스트에 가까웠다. 스스로 잡학 다식하다고, 할 줄 아는 게 많다고 믿고 있지만, 무엇 하나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사실 잡학 다식한 분야의 경험과 지식도 일천했다. 면접관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참 제가 좋은 놈인데 보여줄 방법이 없네요, 라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뭐든지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후자는 멘트마저 식상하다.)
첫 탈락 후, 석 달 동안 혼돈의 카오스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뭘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나마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실마리라는 것도 대단치가 않았다. PD에 합격했거나 합격에 가까운 예비 PD들을 살펴본 결과, 하나같이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바로 해외 경험이었다. 어학연수든 교환학생이든 평균 1년 안팎 외국에 머물면서 자신이 관심을 갖는 분야의 경험을 쌓았던 것이다. 그들처럼 대단한 경험을 쌓지 못하더라도 영어라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는 토익 900점이 언론사 서류전형 합격 안정권이라는 게 정설이었는데, 나는 그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해외 경험이 답답하고 지지부진한 상황의 치트키라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겨우 스물여섯이었지만, 당시에는 스물여섯씩이나 먹은 취업준비생이었다. 홀연히 1년 동안 해외에 나갔다가 올 배짱이 없었다. 치트키 없이도 정공법으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결의를 다졌다. 물론 확신은 없었다. 여전히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나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