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by 라이언

일단,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문자 그대로 일단, 낙향한 것이었다. 마땅히 목적지를 정해 두고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어서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가을에 퇴사하겠다고 말해놓고선 그해 첫 폭설 뉴스까지 만들고 퇴사했으니, 진로를 고민할 시간이 적잖게 있었다. 하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었다. 오늘 걱정은 내일, 내일 걱정은 모레로 미루던 때였다. 아직 어리니까 뭐든 다시 시작하면 잘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군 제대 이후 취업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맞은 첫 쉼표이자 휴식이었다. 부모님 집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라고는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됐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날따라 잠이 들지 않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그날은 잠을 설치게 마련인데, 그날이 그랬다. 그날 밤 무슨 일을 했느냐면, 세상의 모든 직업을 눈앞에 부채꼴로 펼쳐 놓고, 한바탕 직업 탐구에 돌입했다. 진즉에 했어야 할 일이다.


첫 번째 후보는 회계사였다. 경영학 전공도 아니거니와 회계학을 수강한 적도 없었다. 숫자 알레르기도 있었다. 게다가 수학과 담쌓고 산 지 거의 10년 가까이 됐을 때니까,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첫 번째 검토 대상이었던 건 고교 동창들이 모두 공인회계사시험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갈까, 고민하는 1인이었다. 도전할 만한 시험인지 동이 트면,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녀석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자, 다음 후보 들어오세요.


두 번째 후보는 공무원이었다. 5급을 보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7급 합격도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핸드폰을 꺼내 초록 검색창에 ‘7급 공무원 시험’이라고 또박또박 쓰고, 검색 버튼을 눌렀다. 세상에 시험과목이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다. 국어, 영어, 한국사, 헌법, 행정법, 행정학, 경제학. 이 땅의 모든 공시생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미국 공항 보안검색대 직원에 빙의해 “넥스트”를 외쳤다. 다음 후보 들어오세요.


세 번째 후보는 변호사였다. 사법고시 시절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냈겠지만, 로스쿨로 바뀐 터라 검토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렇다고 로스쿨이 만만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라고 생각한 게다. 한두 다리 건너 로스쿨에 다니는 분들이 있어서, 전해 들은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끝내 고액의 학비가 가시처럼 걸렸다. 평소 차입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어서, 은행이든 부모님 찬스든 꺼려했다. 수중에 돈으로 감당할 수 없는 등록금을 보고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네 번째 후보는 성우였다. 정말 우연이었다. 우연히 그날 밤 검색을 하다 케이블 방송사의 성우 공개채용공고를 봤을 뿐이다. 단언컨대 평생 한 번도 성우가 되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모공을 활짝 열듯이 모든 가능성을 열지 않았더라면 검토조차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지원방법은 간단했다. 제시된 지문을 녹음해 업로드하면 끝. 기자 시절 ‘목소리는’ 좋다는 칭찬을 여러 번 들었던 터라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선배들의 ‘목소리는 좋다’의 맥락을 되짚어 봤다면 결코 도전하지 않았을 게다. 이 말은 분명히 비디오와 비교해 ‘목소리가’ 그나마 낫다는 뜻이었으리라. 무엇보다 성우는 단순히 좋은 목소리뿐 아니라, 연기력도 필요했다. 나의 첫 성우 도전기는 당연히 실패였다.


다섯 번째 후보는 대학원 진학이었다. 이 역시 차입을 선호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인지라 쉽게 포기했다. 영어라는 장애물도 한몫했다. 한국에서 대학원 진학의 칼을 뽑았으면, 미국 어느 대학에서라도 박사 학위를 따와야 박사 취급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내게 영어는 트럼프가 자랑하는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만큼이나 위압적이고 거대해 보였다. 단순히 영어만 배우러 가는 어학연수라면 모를까. 패스를 외칠 수밖에. 돈과 영어로 이뤄진 콤보 공격에 칼집에 손을 대기도 전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직업 탐구 삼매경에 빠진 사이, 가려진 커튼 틈 사이로 또 다른 날의 태양, ‘Another day of sun’이 비춰 들어왔다. 영화 <라라랜드>의 오프닝만큼 활기차진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터라, 점점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영화 <베를린>에서 류승범이 인간이 가장 약해지는 시간이라, 소련이 적을 공격하는 시간이라고 말한 새벽 4시도 이미 지난 후였다. 소중한 수면 시간을 통째로 날린 마당에, 뭐라도 하나 얻어가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쏟아지는 잠을 간신히 참고 떠올린 건 PD였다. 이런,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이렇게 무섭다.


회계사시험은 어떻게 됐냐고? 다음날 회계사를 준비하는 녀석의 조언을 듣고, 먼저 회계원리를 공부하기로 했다. 회계원리는 일종의 맛보기라고 했다. 맛을 보고 확신이 들면 본격적으로 시험준비에 들어가라고 했다. 실제로 한 달 동안 회계원리를 공부하고 모 법인이 주관하는 자격증도 취득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췄다. 방송국 놈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