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를 믿는 편이다. 그것도 잘. 오늘의 운세 없이 하루를 열면,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기어이 신문의 운세 란을 펼쳐 보고 나서야 마음이 안정된다. 덧붙여 말하자면, 특정 신문사의 운세만 편식하면 안 된다고 믿는 터라, 평균적으로 세 개의 신문과 두 개의 포털사이트를 종합적으로 보고 오늘의 운을 점친다. 그야말로 운세 신봉자인 셈이다.
한 번은 후배 녀석이 내 사주를 봐준 적이 있다.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였다. 그 후배는 할머니에게서 사주를 배웠는데, 제법 지나간 일을 잘 맞췄다. 후배 말인즉슨 내 사주에 역마살이 끼었다고 했다. 이런 경우에는 돌아다니는 직업을 갖는 게 좋단다. 그러면 기자가 제격인데 어렵게 들어간 방송국을 그만둬 안타깝다는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방송국에서 일하는 동안 돌아다니는 일 자체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기자가 좋은 이유는 이거 하나지만, 기자가 싫은 이유는 밤새 열거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나는 기자 부적격자였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이유를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노릇이니, 크게 둘로 나눠서 설명하려고 한다. 이 두 가지가 기자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경험으로 배운 바, 글빨보다 이 두 가지가 더 중요하다.
첫째, 눈치가 없다. 어느 취재원이 숨겨야 하는 일을 제보하면서 A부터 Z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겠는가. 어느 정도 눈치껏 알아차리고, 취재해 기사를 완성하기를 바랄 것이다. 괜히 제보했다가 기자의 전화통에 시달리고 싶은 취재원은 없다.
당시에는 8시 메인 뉴스가 끝나면 경찰서를 돌며 취재를 했다. 보통 밤 9시쯤 경찰서 정문에 도착해 의경들과 인사하고, 형사계와 강력계를 도는 식이었다. 해야 하는 일을 가능한 미루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지라, 경찰서에 들어가기 전에 정문에서 의경 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소소한 낙이었다. 가끔씩 고생한다고 음료수나 과자, 담배 따위를 사주기도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8시 뉴스 엔딩 음악을 듣고 경찰서로 갔다. 의경 동생들과 인사를 하고 경찰서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날따라 한 녀석이 나를 초소 뒤편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고 나서 평소와 다른 낌새를 채지 못했냐고 물었다. 도무지 무슨 일이냐고 반문하는 내게, 그 녀석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옷을 가리켰다. 정복이었다. 야간 근무를 하면서 정복을 입은 걸 본 적은 없었다. 보름달 뜬 날처럼 환하게 불이 켜진 경찰서와 그 녀석 정복을 번갈아 봤다. 그날 낮에 전경 여럿이 탈영하는 바람에 경찰서에 비상이 걸렸던 것이다. 특종이었다. 하지만 의경 동생의 힌트가 없었다면 눈앞에서 특종을 놓쳤을 게 자명하다.
둘째, 지구력이 없다. 일간지 기자도 마찬가지겠지만, 방송국 기자는 매일 뉴스를 생산해야 한다. 지역 뉴스는 서울 뉴스에 이어 10분 안팎으로 편성된다. 10분이면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뉴스 리포트 한 개의 평균 시간과 지역 방송국 인력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보도국 막내여서 제 몫을 해내지 못했다. 지역 시간의 대부분은 선배들의 뉴스로 채워졌지만, 그 부담에서조차 자유로울 정도로 낯짝이 두껍진 못했다.
근근이 단신 기사라도 쓰면서 밥값을 하고 있던 날, 문득 회의감에 빠졌다. 내가 쓰는 기사가 시청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든 것이다. 방송국 놈들은 입버릇처럼 국민의 알권리 타령을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루만 지나면 잊힐 기사에 시간을 쏟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매일 뉴스를 만드는 내 신세가 산 정상으로 바위를 올려놓으면 바로 아래로 굴러 떨어져 다시 올려놓아야 하는 시지프스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 영원한 노가다를 버티는 유일한 방법은 지구력 말곤 없었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 부장님께 퇴사하겠다고 다시 말했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꼭 무슨 사건이 벌어져야 결심을 하는 건 아니니까. 구태여 사족을 덧붙이자면, 한 번 아닌 걸 잊어버리고 기자를 업으로 삼았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 게다.
마침 부장님도 나도 퇴근하는 길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던 부장님이 돌아서 말했다.
"사쓰마와리 도느라 고생했는데 아깝지 않냐? 여기서 1~2년 더 경력 쌓고 서울로 가"
뜻밖의 대답이었다. 내가 상상한 건 이를테면 "네가 그만두면 선배들이 고생할 건 생각 안 해봤냐?"라든지 "왜 네 입장만 생각하느냐?" 따위의 다소 진부하면서도 꼰대스러운 말이었다. 그동안 부하 직원을 장기판의 졸로만 보는 분들을 많이 만났기에, 후배의 앞길을 진심으로 걱정해주셨던 부장님의 말은 퍽 감동적이었다. 그 말에 약해졌던 건지, 후임을 구할 때까지만 일을 한다는 게 결국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고 나서 퇴사했다. 다음 계획이 없던 상황이어서, 딱히 회사를 그만두고 당장 할 일도 없었다.
길지 않은 기자 시절, 즐겁게 일했던 게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 특집 방송이었다. 평창 현지에서 뉴스룸 세트를 차리고,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자크 로케 위원장이 “평창”이라고 외치는 장면을 뉴스로 전했다. 그때에는 2018년까지 한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 평창 동계올림픽도 지난 일이 되어버렸다. 가끔씩 평창을 떠올리면, 그때 한고비만 넘었더라면 지금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