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한 플랜 A

by 라이언

다시 상경한 건 4월이었다. 지방 사람들은 한강철교를 건너면서 서울에 왔다는 걸 실감한다. 한강철교는 서울이라는 고향의 동네 어귀나 다름없다. 그러고 나서 햇빛이 부서져 금빛으로 빛나는 63 빌딩을 보면, 어머니 품에 안긴 듯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무래도 눈에 익은 풍경에 잔뜩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녹는 것이다.


1년 만에 서울에 돌아왔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나만 기자에서 다시 취업준비생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학교 앞에 다시 베이스캠프를 차리기로 한 나는, 학교 정문 근처에 있는 하숙집을 구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2년 가까이 하숙집에서 기거했는데, 아침과 저녁식사를 제공해주는 데다 앞방과 옆방에 사는 학생들과 서로 의지할 수 있어 좋았다. 그때에는 학교 후문 근처에서 지냈는데, 이번에는 학교 정문으로 옮겼다. 후문에서 지하철역까지 꽤나 멀었기 때문이다. 방송사 대비 스터디를 하거나 필기시험과 면접을 보러 다니려면 지하철역과 가까운 곳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으로 스터디 모임을 찾았다. 언론고시반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미 한 번 합격해서 나간 터라 다시 받아줄 지도 미지수였다. 전통적으로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아랑에서 스터디를 구한다. 아랑은 예비 언론인의 성지 같은 곳이다. 하지만 나는 1년 넘게 카페에서 눈팅만 했을 뿐, 정회원이 아닌 탓에 글을 게시할 수 없었다. 또 나에게 딱 맞는 스터디도 없어 보였다. 마침 학교 언론고시반에서 나와 혼자 방송사 공채를 준비하는 후배 소식을 들었다. 그 후배도 함께 공부할 스터디원을 구하던 참이어서 둘이 함께 PD 시험 준비를 하게 됐다.


익숙한 하숙집, 익숙한 후배, 익숙한 스터디. 어쩌면 여기서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게 아닐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살아온 방식대로 산다고 하지만, 이 관성의 법칙이 성공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게다가 한 번 실패했다면 다른 길과 다른 방법을 모색했어야 했다. 나는 이미 실패했던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심지어 아무런 의심조차 없이, 천금 같은 20대 청춘에 말이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그해 4월에 예능 프로그램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던 케이블 방송사 시험을 치렀다. 당시 방송가에서는 한창 오디션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 방송국의 PD 시험도 오디션으로 치러졌다. 현직 PD 앞에서 왜 자신이 PD가 되어야 하는 지를 설득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방송국에서 시도한 적이 없는 면접 유형이었다. 다시 말해, 참고할 만한 족보를 구하기 어려웠다. 마치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대를 잡고 엑셀레이터를 밟은 것처럼 불안했다.


어떻게 오디션을 치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모나미 펜에 나 자신을 빗대어 설명했던 상황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내 인생에서 오려 내고 싶은 일이었던 게 틀림없다. 평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수 지망생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장기자랑을 하는 걸 볼 때만 해도 내가 저 자리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형편없는 실력의 지망생들에게 독설을 뱉는 심사위원에게 감정을 이입해 속 시원해하던 게 후회됐다. 물론 내 오디션에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독설을 듣진 않았지만,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면접장 공기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와 맞지 않는 옷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차피 내가 일할 곳은 한 곳이라고, 나와 맞는 방송국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하면서. 아무리 능력이 출중한 놈도 동시에 두 곳 이상의 방송국에서 일할 순 없으니까. 물론 프리랜서를 제외하고 말이다.


5월쯤에는 종교 방송 PD에 지원했다. 종교 방송답게 필기전형에 천주교 교리 시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냉담한 지 10년이나 넘었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를 방송국 놈으로 만들어줄 것만 같았다. 교리 공부를 한건 아홉 살 첫 영성체 이후로 처음이었다. 전문 서점에 들러 교리책도 한 권 구입했다. 이게 겉보기에는 <샘터>처럼 얇지만, 속은 <공산당 선언>처럼 알찼다. 여러 번을 곱씹어서 읽은 후에도 깊고 넓은 하느님의 뜻은 알 듯 모를 듯했다. 어지간해서는 범인이 헤아리기 어려운 세계였다. 간절한 마음이 우주에 닿은 건지, 규칙적이고 절제된(?) 삶을 사는 나와 맞는 옷이었던 건지, 무사히 필기시험에 이어 1차 면접도 통과했다. 하느님이 나를 보우하신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2차 면접 전형, 그러니까 최종 면접은 방송국 사장님과의 면접이었다. 그 방송국의 사장은 신부님이었는데, 하느님과 어리석은 중생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자임하시는 분답게 온화하고 성스러워 보이셨다. 사장실에는 신부님과 나, 단 둘이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로 둘러싸인 고요한 성당 안에 마주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보통 게임의 최종 보스답지 않은 따뜻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긴장을 늦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을 말해주실래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딱히 힘들었던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유복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게 자랐고, 굳이 기자 시절 에피소드를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문득 군 입대 직전에 나를 찬 여자 친구가 떠올랐다. 입만 열면 술술 나올 에피소드였지만, 이성의 끈을 붙잡았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다른 에피소드라도 침소봉대해서 그럴듯한 모범 답안으로 탈바꿈하든지. 하지만 나는 고해성사를 보듯이 전 여자 친구와 힘들었던 일을 신부님께 고하고 있었다. 신부님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시고선 이렇게 답하셨다.


“그게 참 어렵지요?”


그 자리에서 신부님이 집에 돌아가 주의 기도 열 번을 외라고 보속을 주셨으면, 아멘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제야 이번에도 방송국 놈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날 면접을 끝으로 다시 부모님 집으로 내려갔다. 이 종교 방송을 제외하고는 전형이 진행되고 있는 방송국이 없었고, 6월로 달이 바뀌어 하숙비도 새로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부모님 집에서 최종 결과를 기다리는 편이 나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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