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키지 않는 일은 전통적으로 수행하지 않던 업무다. 당연히 전임자가 남겨 놓은 서류도 없고, 참고할 만한 가이드라인도 없다. 맨땅에 헤딩하듯 처음부터 하는 수밖에. 스스로 개척자가 되려면 새롭게 공부를 해야 한다. 적어도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놓으려면. 칼을 뽑았으면 뭐라도 베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선택한 방법은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었다.
병원 홍보실 입사 3년 차의 일이다. 사내 인트라넷에 해외연수 공고가 떴다. 선배의 권유로 연수계획서를 써 제출하게 됐다. 사실 일하던 직장이 병원이다 보니 해외연수도 의사와 간호사 중심으로 돌아갔다. 불평할 수도 있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이렇다 보니 사무직에 배정된 해외연수 인원이 많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연말에 해외연수에 지원했는데, 운이 좋게도 신년에 연수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눈여겨봤던 미국 병원에 직접 방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무리 인터넷으로 미술 작품이든 지구 반대편 도시든 구경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 못하지 않는가.
그해 여름, 미국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메이요클리닉을 방문했다. 로체스터는 미국 북중부 미니애폴리스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다. 로체스터는 걸어서 1시간이면 도심을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다. 인구 10만 명의 소도시를 먹여 살리는 게 바로 메이요클리닉이다. 이 병원 덕분에 도시가 존재한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만큼 메이요클리닉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메이요클리닉은 매년 미국 병원 랭킹에서 존스홉킨스 대학병원과 1, 2위를 다투는 톱클래스 병원이다. 아랍 부호들이 수술을 받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고, 살려줘서 고맙다며 기꺼이 거금을 기부한다. 로체스터 전체 인구 60%에 달하는 6만 명이 메이요클리닉과 이 병원 방문객을 위한 숙박 및 외식업에 종사할 정도이니, 메이요클리닉의 위상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나는 메이요클리닉 소셜미디어센터가 주최한 소셜미디어 레지던시 및 소셜미디어 서밋에 참석하기 위해 로체스터에 방문했다. 메이요클리닉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던 비결로 많은 이들이 환자 중심의 진료 철학을 꼽는데, 소셜미디어센터는 이 진료철학을 메이요 담장 밖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행사명이 거창한 느낌을 주지만, 쉽게 말해 헬스케어 종사자를 위한 소셜미디어 교육과 세미나였다. 소셜미디어 레지던시는 전반적인 소셜미디어 홍보 전략, 블로그∙트위터∙페이스북∙비디오 활용 실전 방법 등으로 구성된 기본교육이었고, 서밋은 메이요클리닉 소셜미디어센터의 노하우 공유, 그룹별 토의, 소셜미디어 홍보계획 수립과 코칭 등으로 이뤄졌다.
나흘간 로체스터에서 머물었던 나는 레지던시 참석자들과 소셜미디어센터 시스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행사에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 70여 명이 참석했는데, 한국인은 나뿐이었다. 아시아로 범위를 넓혀도 고작 일본인 남성 1명이 더 있었다. 우리는 명함을 주고받고 인사를 교환했다. 그는 중년의 홍보대행사 대표였다. 우리는 소셜미디어 홍보와 소셜미디어 레지던시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소셜미디어 홍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변화하는 시대에 고객에게 효과적인 홍보를 제공하기 위해 당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행사 참석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메이요클리닉이 주최하는 행사의 단골손님이었다. 심지어 그해 가을, 호주에서 열리는 서밋에서는 일본 소셜미디어 홍보를 주제로 강연을 열 예정이었다. 내심 중년인 그보다 소셜미디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행사장에 들어갔다. 행사 시작에 앞서 같은 테이블에 앉은 참석자들끼리 인사를 주고받았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일곱 명이 앉아 있었는데, 셋이 중년 여성이었고, 넷은 30대로 보였다. 다른 조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서밋에서는 다시 조편성이 되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전체 참석자의 30~40%가 중년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홍보수단을 익히려는 그들에게 나이는 장애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이를 의식하는 건 나뿐인 듯했다. 보통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으로 변한다. 오랜 시간 쌓아온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 새로운 수단이나 방법을 멀리 하기 마련이다.
한국에서는 소셜미디어 홍보가 젊은 직원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다. 남들이 다하니까 불안한 마음에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계정을 일단 만들거나, 젊은 사원들이 소셜미디어 홍보의 필요성을 역으로 제안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그날 로체스터에서 만난 그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기는커녕 즐겼다. 배움에는 늦은 때가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어쩌면 배우려고 하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
그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메이요클리닉 소셜미디어센터의 시스템이었다. 당시 설립된 지 겨우 5년 된 조직치고는 꽤나 체계적이었다. 소셜미디어센터는 건강정보, 병원행사, 환자 스토리 등을 통해 메이요클리닉의 진료철학을 전파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셜미디어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우선, 병원 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SNS 훈련과 상담을 제공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배포했다. 병원 공식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계정뿐만 아니라, 의료진 한 사람 한 사람이 환자들과 소통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구성원 모두의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혁신은 추진부서만의 노력으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메이요클리닉이 중심이 된 소셜미디어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웹사이트를 통해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정기적으로 온라인에서는 웹 세미나를 열고, 오프라인에서는 레지던시와 서밋을 개최한다. 소셜미디어 교육 수요자의 요구를 충족하는 동시에, 메이요클리닉 소셜미디어 노하우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울러 물리적인 거리 탓에 오프라인 행사에 참석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안방에서도 메이요클리닉 노하우를 학습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소셜미디어 운영철학과 지침을 담은 소책자도 출간했다.
메이요클리닉 소셜미디어센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누구나 하는 SNS 콘텐츠를 만들고, 어딘가에 있을 법한 온라인 강의를 제공하며, 한 번쯤 참석해봤을 세미나를 개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눈여겨본 것은 각각의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변화에 대응하는 우아한 유연성이었다. 메이요클리닉은 매머드급 조직이다. 미국 미네소타, 플로리다, 애리조나 등 3개 주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미네소타 로체스터 직원만 3만 명이 넘는다. 이 같은 거대 조직이 변화에 대응하는 모습이 웬만한 스타트업보다 유연하고 빠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세상은 늘 변화한다. 우리는 이미 고도 압축성장을 통해 앨빈 토플러가 말한 세 물결을 겪은 바 있다. 이제 AI와 빅데이터가 이끌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온다. 아니, 미래는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른다. 변화에 적응하는 이들의 속도 차이만 존재할 뿐. 이왕 받아들일 것이라면,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그 편이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