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Ⅱ

by 라이언

내가 쓰는 이메일 아이디는 ‘hacademicvs’다. 암호 같은 아이디는 나름 작명의 진통을 겪고 세상에 나왔다. ‘h’는 ‘homo’의 머릿글자이고, ‘academicvs’는 ‘academicus’의 ‘u’를 ‘v’로 바꿔 쓴 것이다. 이는 중복되는 아이디를 피하면서도 동시에 아카데미쿠스로 읽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의도대로 읽으면 호모 아카데미쿠스(Homo Academicus)인 셈이다. 호모 아카데미쿠스, ‘공부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평소에도 일과 관련된 책이나 교육에 의지하는 편이나, 평생 배우고 깨달으면서 살겠다는 마음을 이메일 아이디에 담은 것이다.


최근에는 블로그, 페이스북, 유튜브 등 플랫폼의 유효기간이 짧다. 블로그 생태계에 대해 알만 하면, 페이스북을 공부해야 하고, 페이스북에 적응할라치면 갓튜브를 영접해야 하는 식이다. 지식의 수명이 짧은 만큼 공부하지 않으면 금세 뒤쳐질 수밖에 없다. 해마다 한 번씩은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하다 보니, 자칭 프로 교육러가 됐다. 직장 생활을 한 이래 이수한 교육만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대부분 업무와 관련된 교육이었다. 사진, 마케팅, 소셜미디어, 블로그, 유튜브,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따위의 교육을 이수했다. 펼쳐 놓고 보니 이런 교육도 들었나 싶은 것도 있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무조건 시키는 대로만 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을 하게 됐다. 2017년에는 버즈피드의 ‘테이스티’에서 영감을 받아 영상 콘텐츠를 만들었다. 40초 안팎의 화학실험 영상 ‘케미컬’이었다. 이 영상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페이스북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화학 거품과 폴리우레탄 만들기 영상이 각각 조회수 12만, 11만 회를 기록했다. 2018년에는 연구자 인터뷰 영상 ‘케미뷰’도 만들었다. ‘케미뷰’는 ‘케미스트리’와 ‘인터뷰’를 각각 따와 만든 조어다. 진로 고민이 많지만 마땅한 멘토가 없는 화학전공 대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벌였다. 인생에서 중요한 갈림길 위에 있는 이공계 졸업반 대학생들에게 현직 연구자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이름하여 ‘여름방학 특강’이었다. 학원가의 방학특강 콘셉트를 따와 대학생들에게 필요한 진로특강과 랩투어로 꾸몄는데, 예상 외로 반응이 좋았다. 공식 페이스북 채널을 통해 접수를 받았는데, 정원 20명의 7배에 달하는 140여 명이 몰렸다. 결국 한 명에게라도 더 기회를 주고자 행사장을 좀 더 큰 곳으로 변경하고 40명을 초대했다. 현직자들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는 대학생들의 반짝이는 눈에서 일을 벌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일과 공부란 게 1년 중 특정 시기에만 하는 게 아니어서, 종종 연초 MBO에 없던 일도 하게 된다. 영상과 SNS 콘텐츠 모두 이런 과정에서 태어났다. 이웃 회사 홍보실에도 소문이 나 벤치마킹 전화도 심심치 않게 걸려온다. 단골 질문이 영상제작을 어느 업체에 맡기냐는 것이다. 현재 일하는 공공기관 홍보실의 경우, 인력이 충분하지 않아 일부 업무는 외주를 주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기획, 촬영, 편집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답하면 적잖게 놀란다. 사실 자랑할 만한 실력은 아니어서, “선생님도 배우면 곧잘 하실 거”라고 덧붙여 말하곤 한다. 그래도 내심 뿌듯한 건 병원 홍보실에 다닐 때만 해도 영상 제작은 언감생심이었기 때문이다. 내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다 보니,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됐고, 그게 새로운 능력이 된 것이다.


회사 동료들은 내가 콘텐츠든 행사든 새로운 일을 하자고 설득할 때, 어린아이처럼 신나 보인다고 말한다. 시키는 대로만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싹튼 일을 눈앞에 보이는 결과로 만들어내는 게 즐겁다. 상상만 했던 일이 현실로 변하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꼭 보상이 없더라도 ‘멋지다’, ‘재밌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에 힘을 얻는다. 물론 돈과 승진 등 물질적 보상이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어쩌면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은 어제보다 성장한 자신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