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호 Apr 12. 2022

로또와 산책

#일상 #위로 #퇴사 #가족

각봉투를 사러 다이소에 갔다. 역시 다이소엔 없는 게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것도 없었다. 다음날 교보문고에 들러볼 요량으로 다이소를 나섰다.


집으로 가는 길에 '로또 2등 당첨 나온 명당'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인 현수막을 봤다. 어느 지방 고등학교의 서울대 합격자 플래카드처럼 과장되게 펄럭였다. 마침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운세에서 횡재수가 있다는 글귀도 떠올랐다. 모든 사행성 오락에 첫발을 들이는 사람들처럼 나는 그걸 운명으로 읽었다. 현수막을 다시 올려다 보고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길게 펼쳐진 레드 카펫 위를 걷듯이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편의점 한구석에는 아저씨 한 분이 핸드폰과 로또 용지를 번갈아 보면서 숫자를 한 자 한 자 마킹하고 있었다. 어젯밤 꿈에서 나온 숫자라도 적어온 모양이다. 나는 몇 개를 마킹해야 하는지 몰랐다. 한마디로 로또 초보였다. 아저씨한테 물어보고 싶었지만, 수능을 치는 학생처럼 집중하고 있어서 차마 방해할 수 없었다. 고민하다가 로또 용지에 6/45라고 적힌 걸 보고 숫자 6개를 골라 칠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로또 용지와 카드를 건네는데, 현금만 가능하단 말이 돌아왔다. 현금이 없다고 하자 그녀는 손으로 편의점 구석의 ATM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뽑으시면 돼요." 나는 고개를 돌려 ATM을 힐끔 봤다. 대학생 시절 오밤중에 편의점 ATM을 애용하던 게 떠올랐다. 그때 나는 멈출 줄 모르는 폭주 기관차 같았다. 이른 저녁 반주로 시작한 술자리는 2차, 3차로 이어지기 마련이었고, 술값이 떨어지면 ATM에서 값비싼 수수료를 치르고 현금을 뽑았다. 술과 로또가 묘하게 한 장면에 포개졌다. "그냥 다음에 살게요." 그러자 다시 말이 돌아왔다. "벌써 뽑아서 안돼요."


나는 어쩔  없이 집에 전화를 걸었다. 순간의 유혹을 참지 못해서 문방구에 붙잡힌 초등학생처럼. 엄마한테 산책할  잠깐 나오시라고 했다. 십여  정도 어색한 시간이 편의점에 부유했다.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는데 반가운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값을 치르고 엄마와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일군의 상가 건물을 따라서 나란히 걸었다. 환하게 간판을 밝힌 점포들 사이로 드문드문 이가 빠진 것처럼 불이 꺼진 곳도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여파겠지. 문득 경기가 어려울 때에는 월급쟁이가 최고, 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엄마가 내게 물었다.

"20억 되면 뭐하지?"

"퇴사하고 미국 갈까?"

"갔다 와서 뭐 먹고 살게?"

"영어 배워 와서 가르치지."

그리고 한참 더 걷다가 내가 말했다.

"에이, 20억은 됐고 2천만 원이라도 되면 좋겠다."

"왜?"

"마이너스 갚게."


엄마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면서 걸었더니 어느새 아파트 단지 입구였다. 단지 내 도로를 따라 벚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느 벚꽃 명소에 뒤지지 않았다. 가로등에 비친 벚꽃이 겨울밤 눈처럼 소담했다. 엄마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셔터를 눌렀다. 즐거운 상상과 뜻밖에 산책, 벚꽃 놀이로 어우러진 추억만으로 이미 로또는 제값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로또에 당첨된다면, 기꺼이 당첨금을 수령할 테지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또 청첩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