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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Apr 19. 2022

또 청첩장

#여자 #추억 #사랑

또 청첩장이다. 이러면 한주에 여러 장을 받은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주말에만 결혼식을 두 탕, 세 탕 뛸 만큼 인싸도 아니고, 친구들 중에 장가갈만한 놈들은 다 가기도 했다. 겨우 후배 청첩장 하나를 받아 놓고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노총각 히스테리다.


지금이야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지만 시작부터 이러진 않았다. 나에게도 호시절이 있었다. 나의 비범한 연애 능력이 최초로 관찰된  여섯  때이다. 엄마는 당시를 회상할 때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여기부터는 엄마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이야기다.


우리 가족은 내가 여섯   직할시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길을 건너면 기찻길과 논밭이 펼쳐진 소도시의 주택에 살던 내게, 9  754세대의 아파트 단지는 생경했다. 생전 처음보는 규모와 높이에 압도되었는지 나는 "엄마, 아파트가 13층이나 되고 엘리베이터도 타야 해서 집에  찾아올  같아."라고 걱정을 늘어놓았다. 지레 겁먹은 표정을 지은 채. 이사  첫날, 막내아들의 말에 엄마는 적이 걱정하셨다.


하지만  말이 성동격서 전술로 밝혀지는데 하루면 충분했다. 나는 낯선 환경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했다. 이튿날 아침밥을 먹고 쌩 나가더니 웬 여자 아이를 집에 데려온 것이다. 그것도 손을 꼭 잡은 채. 밖에 나가면 집을 못 찾아올 것 같다는 아이는 온데간데없었다.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나를 보고 엄마는 놀라움 반 감탄 반으로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여자 아이는 같은  1층에 사는 동갑내기였다. 이름은 구태여 밝히지 않겠다. 아마도 아이의 엄마가 되고 가정을 꾸렸을 게 틀림없으니까. 괜히 그녀의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다. 나는 평화주의자다. 우리는 한동안  붙어 다녔다. 놀이터에서 미끄럼틀과 시소를 타면서 함께 놀았고, 집에 와선 엄마가 주는 간식을 같이 먹었다. 여섯 살 먹은 꼬마들이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애는 익명의 대도시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꽤나 신중했던 모양이다. 여느 또래처럼 프러포즈를 함부로 발화하지 않았다. 과연 그 나이에 인생에서 책임이 가지는 무게를 알았던 걸까. 아니면 앞으로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염두에 뒀던 걸까. 여섯 살 내 마음속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기는 서른여덟이 되어도 여전히 모르겠지만. 엄마 말에 따르면 내가 미술학원에, 그 애가 교회에 다니면서 서로 소원해졌다고 한다.


우리 집안은 예나 지금이나 보수적이다. 다시 말해 범상치 않은 연애 능력이 조기 교육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타고난 능력으로 설명할 수밖에. 언젠가 유튜브에서 본 전문가의 말이 떠오른다. 인간의 능력 중 30%는 선천적으로 타고 나고, 70%는 후천적으로 길러진다는 말이었다. 그때 가졌던 걸 지금도 가지고 있으면 좋으련만. 재능을 굳세게 믿고 노력을 게을리한 탓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내게서 처음 만난 여자에게 무심히 말을 거는 용기를 빼앗아 간 탓인지 내 옆자리는 여태 부재 중이다. 


평소 존경하는 봉준호 감독님의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인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를 패러디한 말로 끝맺는다. 1인치 정도 되는 두려움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이성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그 언어는 사랑이다. 


그나저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됐으니까 결혼식이 봇물 터지듯 열리겠지. 후, 후배들이 청첩장을 주러 오는 걸 알아채고 자리를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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