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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Apr 30. 2022

너의 의미

#팬 #여자 #아이유

- 자리에 있습니까? 

- 네. 

짤막한 문자를 보냈고 곧바로 그보다 짧은 답이 왔다. 남자들의 대화란 늘 이렇다. 겨울철 건조한 피부보다 버석하다. 회사 선후배 관계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미사여구를 철저히 배제한 채 물을 것만 묻고 답할 것만 답한다. 우리가 특별히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사이는 아니지 않냐는 듯이.


"이게 뭡니까?" 감추려고 해도 티가 나는 팔레트 형태의 앨범을 들고 있는 나를 보고 후배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앨범을 슬쩍 보이며 볼웃음을 지었다. "아이유 앨범 아닙니까?" 점심시간에 알라딘에 들러 샀다고 하자, 후배는 자신도 유애나라고 반색을 했다. 마땅히 자랑할 데가 없었는데,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것이다.


나는 아이유의 오랜 팬이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햇수로 10년이 넘은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날까지는, 그 뉴스를 듣기 전까지는 콘서트에 간 적도 없거니와 앨범을 사지도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렇다고 멜론에서 디지털 음원을 구입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노래만 들었을 뿐이다. 그녀의 피, 땀, 눈물이 밴 창작물에 숟가락을 얹듯 귀만 연 것이다.


지난해 6월 초였다. 아이유가 청담동에 100억 원이 넘는 아파트를 분양받았다는 뉴스가 포털 사이트를 장식했다. 주변에서는 분양가에 절로 벌어진 입을 수습하느라 바빴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그녀의 자산 형성에 한 푼도 기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 것이다. 회한이 서린 목소리로 동기 녀석에게 반성문을 읊었다. 가족에게조차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녀석은 유튜브로 뮤직 비디오를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답했다. 역시 지폐에 새겨진 숫자와 친한 녀석다운 답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편해지기는커녕 뒤늦게라도 아이유에게 작은 보답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날 바로 나는 알라딘에 들렀다. 그해 봄에 발매된 «라일락» 앨범을 샀다. 은혜 갚는 까치의 심정으로. 조성모의 «아시나요» 이후로 내 돈 내고 산 첫 앨범이었다. 만듦새가 정성을 들인 양장본 같았다. 앨범 안에는 단지 CD와 가사집만 들어있는 게 아니었다. 화보집과 포토 카드, 증명사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안 인형처럼 까도 까도 나오는 선물에 나는 아이처럼 손뼉을 쳤다. 다음날 한달음에 알라딘으로 다시 달려갔다. 이번에는 진열대에서 «챗셔» 앨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어린이날을 앞두고 «팔레트» 앨범을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동안 나는 우울한 날에는 '무릎'으로 위로를 받았고,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다음날에는 '블랙아웃'을 들으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고 안도했다. 나른한 날에는 야광볼처럼 통통 튀는 매력의 '스물셋'으로 스스로를 깨웠고, 외로운 날에는 '금요일에 만나요'를 들으면서 희망의 수를 놓았다. '블루밍'을 들으면서는 언젠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뭐해,라고 문자를 보낼 용기를 내겠다고 다짐했다.


오랫동안 그녀의 노래에 빚을 졌으면서도 보은하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에, 고마운 마음에, 또 응원하는 마음에 앨범을 샀다. 이찬원의 팬인 엄마는 입버릇처럼 "팬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말한다. 엄마는 이찬원의 앨범을 사고 콘서트에 가는 건 물론이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는다. 한평생 인스턴트 식품에 고개를 가로젓던 분이 말이다. 그러면서도 이찬원의 스케줄에 따라 전국을 누비는 팬들에 비해 조족지혈이라고 반성한다. 엄마는 다음 앨범이 나오면 적어도 두 장은 사야겠다고 벼르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감사와 사랑을 가슴속에 담아두지만 않고, 겉으로 표현하는 게 아닐까.


세상은 좁디좁다. 회사 후배님이 유애나일 줄이야.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콘서트도 가 봤습니까?"

"유애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구랑 갔어?"

"시커먼 놈이랑 갔죠."

다음에 콘서트에 같이 가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내뱉을  없었다. 입을 바느질하듯 굳게 다물었. 후배도  내키지 않았겠지만.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성호를 긋고 아이유 콘서트에 함께  여자 친구가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어린이날이니까 하느님이 어린양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하면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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