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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Jun 18. 2022

판도라의 상자

#왕년 #후회 #위로

- 이게  사진이야.

- ㅋㅋㅋㅋㅋㅋㅋㅋ

대학 동기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대학 새내기 시절 사진을 카카오톡 방에 올린 것이다. 얼마 전에 싸이월드 아이디를 찾아 계정을 복구했단다. 카톡방은 금세 멋쩍은 마음을 대변하는 웃음, 소싯적을 그리워하는 회상, 시간의 불가역성을 한탄하는 회한으로 그득 찼다. 어쨌든 사진  우리는 어렸고 살이  쪘고 지금보다는  많이 웃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생의  장을 여는 설렘이 여름날 짙은  내음처럼 물씬 묻어났다.


잊고 있던 오래 전의 나를 만나는  반가운 일인 동시에 놀라운 일이. 내가 이렇게 생겼나 싶어서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거울로 삼아  얼굴을 비춰봤다.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낯선 아저씨가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주름은 눈가와 미간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었다. 아이폰  버튼을 눌렀다. 금세 화면이 밝아졌다. 다시 스무 살의 내가 나를 응시했다. 왠지 내게 말을 거는  같았다. 삼십 대는 안녕하냐고.


이십 대의 나는 이랬다. “해보자”, “될 거야”, “재밌겠다”, “할 수 있다”와 같은 말들을 지금보다는 자주 했다. 동기들에게 영상을 만들어보자고 했고, 프로듀서든 기자든 간에 꿈꾸면 될 거라고 했으며, 게시판의 공모전 공고를 보고 재밌겠다고 중얼거렸다. 모든 게 정해지지 않았고 앞날은 불확실했지만 설렘으로 가득찼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기였다. 여러 종류의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줄기세포처럼.


 번은 친구에게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친구는 이제 정신을 차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철없는 망아지를 타이르는 어른처럼 훈계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했을 무렵이다. 나는 풀이 죽기는커녕 오기가 생겼다. 그건  생각일 뿐이라는 식이었다.  후로 영상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번은 축배를 들었고   번은 고배를 마셨다. 결과를 말하려는  아니다. 시도하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감이 항상 약이   아니다. 기자로 일할 때이다. 이따금 대학 선후배, 동기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주변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내게 합격의 비법을 묻거나 나를 우러러보는 이들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혼자서 아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골칫덩이였지만 말이다. 훗날 기자를 그만뒀을   아끼는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되게 건방져 보였어.” 자신감이 넘쳐 자만이 됐는데 정작 나만 몰랐던 것이다. 이제 자신감이 독이  수도 있다는  아는 나이가 됐다.


한동안 나는 안녕하지 못했다. 이전보다 더 작아졌고 불평이 늘었고 살아보지 못해 알 수 없는 날들을 아쉬워했다. “내가 어떻게…”, “해봐야 소용없을 거야”, “했어야 했다”와 같은 말들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이런 말들은 나를 일으켜 세우기보다 심해로 점점 침잠하게 했다. 이십 대의 나를 알던 이들이 우연히라도 날 마주친다면 그냥 모른 척해 주기를 바랄 정도로 어둡기도 했다.


이십 대와 삼십  언어의 차이는 시제였다. 자신이 묻어나는 말은 대부분 현재형과 미래형이고, 후회로 점철된 말은 과거형이었다. 근래 들어 나는 자주 왕년을 회상했다. 아직 정해진  많지 않았기에 가능성이라는 문이 열려 있었던,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서 위로받으려고  모양이다. 이런다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정으로 나를 위로해준  글이었다.  안의 무언가를 글로 쏟아낸 날에는 숙면을 취할  있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속이 후련해진 이의 마음을   같았다. 무엇보다 글을 쓰면서 활어의 펄떡거림을 다시금 느낄  있었다. 어쩌면 삶에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건 인간의 머릿속에서 후회와 상상으로 있을 , 실재는 오늘뿐이지 않을까. 오늘 내게 주어진 일에 집중하리라.  사진을 보면서 왕년에는, 이라고 운을 떼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모든 날은 남은 생의 첫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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