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 #위로 #선의
오랜만에 고교 동창 셋이 모였다. 한 명은 이따금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사이라 격조하지 않았는데, 나머지 한 명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미국에서 본 이후로 거의 8년 만이었다. 그 친구는 보복 소비를 하듯이 8년 치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날 중식당과 카페에서 그 녀석이 한 이야기는 토씨 하나 빠뜨려도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반짝였다. 정말이지 메모라도 했어야 했다. 오늘은 그중 하나를 꺼내려고 한다. 편의상 이 글에서는 G라고 부르겠다.
G를 떠올리면 완전한 동그라미에 꼭 들어맞는 십자형이 그려진다. 십자형의 수직선은 성장, 수평선은 관계를 가리킨다. 보통 성장 욕구가 크면 주변에 소홀하게 마련이다. G는 어린아이 같은 예술성을 간직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긴다. 둘을 동시에 수행하다가 지레 지쳐서 퍼지지 않을까 아슬아슬해 보일 정도다. 그러면서도 한눈에 담지 못할 만큼의 너른 수평선처럼 개방적이다.
G를 마지막으로 본 건 미국에서였다. 당시 G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포토그래퍼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미국에 처음 가는 데다 매스컴으로 미국에서의 아시아인 혐오와 총기 사고를 접해 겁을 먹고 있었다. 낯선 타지에 친구가 있다는 건 뾰족한 마음을 봄볕처럼 포근하게 감싸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G는 흔쾌히 자취방의 침대를 내어줬다. 나는 오랜만에 연락해 신세를 지는 터라 미안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했다. 오히려 G는 오래전 고마웠던 일을 갚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G는 또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무려 19년 전 수능날의 일이다. 나는 수시모집으로 대학에 합격해 수능을 보지 않아도 됐다. G는 미대 입시를 준비해 예체능 계열로 수능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문계열 친구들과 다른 시험장에 배정됐다. 당시 학교 차원에서 시험장에 응원단을 보냈는데, 예체능 계열 시험장은 제외됐다. 어차피 나는 수능일에 할 일이 없었기에 G의 시험장에 갔다. 정말 교문 앞에서 주먹을 쥐고 응원한 후에 곧바로 집에 돌아왔을 것이다. 초콜릿이나 엿을 준비하는 성의를 보이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내 응원의 약발이 듣지 않았는지 이듬해 G는 재수를 했다. 당시 G는 홍대 앞에서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나는 회기동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서울로 진학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낯선 타향에서 낯설지 않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느낀 모양이다. G도 그중 한 명이었다. 오늘은 G를 만나러 홍대에 가야겠다, 라는 가벼운 마음이었을 게다. 무슨 결심이라도 하고 집을 나선 게 아니었단 말이다. 아마도 나와 G는 홍대 어느 식당에서 고기를 먹고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우리는 얼굴이 불콰하게 물들었을 것이고, 흥에 겨운 나머지 내가 값을 치렀던 모양이다.
G는 젓가락으로 납작 탕수육을 한점 집어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네가 수능날 응원하러 와 주고, 재수할 때에는 홍대에 고기 사 주러 왔잖아.” G는 감사에는 유통기한이 없다는 듯 까마득한 일인데도 감사를 표했다. 보통 호의를 베푼 사람은 오랫동안 기억하지만 그걸 받은 사람은 금세 잊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만약에 감사 지능을 재는 테스트가 있다면, 단연 G가 최고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작은 호의인 데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면구스러웠다. 한편으로 내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좋은 일로 새겨져 있는 것 같아 속으로 찔금 눈물이 났다.
우리는 중식당에서 양껏 먹었다. 나는 계산을 하겠다고 말하고 카운터에 카드를 내밀었다. 코로나 팬데믹 탓에 G의 부친상에 조문하러 가지 못한 터라 내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때 G가 완력으로 다른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사코 값을 치르는 게 아닌가. 오히려 G는 부친상을 입었을 때 경황이 없었는데 전화로나마 위로해줘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오늘 밥을 사려고 했다고 덧붙였다. 남의 선의를 자신이 잘해서 받는 상으로 여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미약한 선의라도 배로 갚으려는 이가 있다. 아무래도 후자를 만나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이번 만남이 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