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성 #인생
아주 오래전이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다. 사진에 콘트라스트를 높이는 필터를 적용한 것처럼. 그날 있었던 일은 물론이고 뺨을 스치는 공기의 온도, 코에 훅 끼치는 냄새까지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날에는 꼭 ‘첫’이 붙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 처음처럼 강렬하고 자극적인 일도 없으니까.
수시모집으로 합격한 대학 동기들과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날의 공기에는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 같이 가볍고 청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여름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캠퍼스 중앙로에서 초록으로 샤워를 할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우리는 종합강의동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장을 맡겠다고 자처한 동기가 연락책으로 수고를 해줬다. 필시 프리챌이었겠지. 온라인으로만 연락하던 동기들과 처음 대면하는 자리인지라 적이 긴장했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 6년 만에 여자애들과 만나자니 여간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게 아니었다. 약속 장소에는 여자 동기장만이 등대처럼 서 있었다. 부지런을 떤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안녕, 네가 민호구나.”
“응, 안녕.”
아마도 짧은 대화 후에 그보다 긴 침묵이 이어졌으리라. 말줄임표를 수없이 복사해서 붙여 놓아도 어색함을 메우기에는 모자랐다. 갈 곳 잃은 눈은 허공을 응시했고 손으로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겁이 지난 것만 같았다. 하필이면 다음으로 도착한 동기도 여자였다. 여자 생물체와 삼자대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에는 확연히 달랐다. 한 학급에서 남자애, 여자애들이 구분 없이 어울렸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에게 부끄러움과 주저함이 없었듯이. 한 교실에서 이성끼리 짝꿍을 한 건 물론이고 체육 시간에는 한 편이 되어 피구를 하고 발야구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예닐곱 명이 무리지어 이리저리 쏘다녔다. 여성은 우정을 쌓을 수도, 사랑을 나눌 수도 있는 상대였다.
6년 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남녀 공학 중학교와 남자고등학교를 나왔다. 중학교는 무늬만 공학이었는데 남자와 여자 반이 나눠져 있었다. 아예 남학급과 여학급의 층이 달랐다. 어쩌다 여자 반이 있는 층에 가면 금남의 구역에 발이라도 들인 듯 화들짝 놀랐다. 사실상 예비 남고였던 셈이다. 남고 시절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나는 이성과 분리된 공간에서 동성끼리 훈육하고 이성 교제를 죄처럼 여기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또래 여자들과 말 한마디를 섞을 일이 없었다. 혼자서 공부하는 유형이어서 학원에도 다니지 않았다. 말하자면 도무지 이성과 접점이 없었던 것이다. 단절은 망상에 망상을 더해 신비한 생명체를 만들 뿐이었다. 잔가지에 붙은 소금이 결정화되어 다이아몬드처럼 보이듯 여성을 제멋대로 신비화했다.
캠퍼스의 초가을 바람에선 한여름 후텁지근함이 느껴졌다. 여자 동기들 그 다다음에 이르러 남자 동기가 왔다. 나는 녀석을 방패막이로 삼아 겨우 숨을 돌렸다. 그때 동기들과 찍은 사진에서 나는 죄다 얼굴을 사선으로 돌리고 있다. 설핏 얼짱 각도로 오인할 수 있는데, 실은 쭈뼛쭈뼛해서 카메라 렌즈조차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한 것이다. 지금도 연락하는 대학 친구는 처음엔 일부러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줄로 오해했단다.
고교에 입학할 무렵 남고가 대학 진학에 유리하다는 말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특히 아들을 둔 엄마들은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사춘기 시절에 자식이 여자에게 눈이 팔려 학업을 소홀히 할까 봐 걱정한 것이다. 이런 말도 성경처럼 떠돌았다. 대학에 가면 여자 친구가 생긴다는 말이었다. 공과대학에 가거나 신학교에 갈 수도 있는 일인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른 게 아닌가 싶다.
두 가지 말이 함의하는 바를 모르는 게 아니다. 이 땅에서 대학 진학이 지상 최대 과제이자, 성공으로 가는 징검다리이기에 나머지는 유예해도 된다는 것이다. 허나, 황혼기에 접어든 선배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관계라고 힘주어 말하지 않는가.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여성과 우정을 쌓거나 서로 사랑해 가정을 이루는 일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분명 인생이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 시절 어른들은 뭣이 중한지 몰랐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