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요리 #실수 #인생
프라이팬을 위아래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면서 찬밥을 볶는 일에 이력이 붙어 갈 때쯤 파스타로 눈을 돌렸다. 성탄절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때였다. 팬 손잡이를 꼭 쥐면 팔뚝의 핏줄이 제 모습을 드러냈는데, 허공에 폭죽처럼 터지는 찬밥 알갱이가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찬밥과 연말은 영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우리 집 주방 찬장에 이국에서 물 건너온 파스타가 있을 리가 없었다. 국수라면 모를까. 대학 시절에도 정문 앞 쏘렌토를 스쳐 지나가기 일쑤였지만, 두 블록 떨어진 은성 칼국수에는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칼국수는 항상 붙어 다니는 시커먼 놈들과도 아무런 사이가 아닌 여자와도 먹을 수 있었다. 파스타는 그렇지 않아서 유감이었다. 쏘렌토 건물에는 산토리니를 연상시키는 순백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어떤 결심을 했는데 졸업할 때까지 끝끝내 뜻했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에코 백을 들고 마트에 갔다. 면 코너에는 코발트빛을 빼닮은 패키지의 파스타가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파란색 책등의 론리플래닛만이 가득히 꽂혀 있는 것 같았다. 일순간 아찔했다. 모두 바릴라 제품이었다. 선택할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돼 좋았다. 패키지에는 큼지막하게 LINGUINE라고 쓰여 있었다. 한편으로 죄다 알파벳이어서 신뢰도가 두 계단쯤 올라갔다. 아무래도 이태리 음식이니까 본토에서 수입한 게 나을 거 같았다.
모든 파스타의 기본은 알리오 올리오다. 이태리어로 알리오는 마늘, 올리오는 올리브유를 뜻한다. 참 정직한 이름이다. 파스타는 처음이니까 기본부터 익히기로 했다. 뭐든지 기본기를 단단히 닦아야 응용도 할 수 있는 법이니까. 요리 유튜브에서는 냄비에 물, 면, 소금을 100:10:1의 비율로 넣으라고 했는데 막상 불 앞에 서자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되어 버렸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실제가 아닌 이상이 적혀 있었던 거 같다. 너도 나도 그대로 하지 않았고 선생님조차 그대로 하는 아이를 보면 놀라곤 했다. 늘 그랬듯이 제멋대로 물은 냄비의 칠부 능선만큼, 면은 500원 동전 크기보다 조금 많이, 소금은 대강 집어서 서너 번 뿌렸다.
파스타 갑을 큐브를 맞추듯 이리저리 돌려봤다. LINGUINE 밑에 그보다 작게 9 MINUTES라고 적혀 있었다. 핸드폰 타이머를 8분으로 설정했다. 펄펄 끓은 물에서 익힌 면을 프라이팬에서 한 번 더 볶을 것이어서 1분을 남겨뒀다. 한쪽에서는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을 볶았다. 아무리 마늘 파스타이지만 마늘만으로는 심심해 보였다. 냉장고에서 등심을 꺼냈다. 된장찌개를 끓일 때 넣으려고 남겨 놓은 것이었다. 자고로 음식에는 남의 살이 들어가야 맛이 산다.
그때 알람이 울렸다. 냄비 물에서 면을 꺼내 프라이팬에 올렸다. 이제부터 면에 소스를 붙이는 과정이다. 진간장 두 숟가락을 골고루 뿌렸다. 왠지 이국의 파스타에서 익숙한 맛이 날 거 같았다. 새로운 걸 시도할 때에는 낯섦과 익숙함 어름이 불안함을 덜어준다. 1~2분 후 불을 껐다. 이제 시식할 시간. 포크로 면을 돌돌 감아서 입에 넣었다. 순백의 쏘렌토와 코발트빛 지중해를 떠올리면서. 엥, 파스타를 대여섯 번 씹어도 목으로 넘기기 어려웠다. 계속 씹다가는 턱이 빠질 거 같았다.
아무래도 조리 시간이 문제인 거 같았다. 파스타 갑의 알파벳을 한 자 한 자 다시 읽었다. “AL DENTE” PERFECTION IN 9 MINUTES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모르는 단어는 큰따옴표 안의 알 덴테뿐이었다. 큰따옴표로 표시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 터. 해답도 그 안에 숨어 있겠지. 재빨리 핸드폰으로 검색을 했다. 아뿔싸, 알 덴테는 치아에 면이 낄 정도로 덜 익은 상태를 말했다. 팬에서 익히는 시간을 감안해 냄비에서 완전히 익히지 않는 것이다. 바보 같아서 혼자 헛웃음을 터뜨렸다. 즉, 알 덴테 9분이라고 하면 냄비에서 9분간 면을 삶고 팬에서 2~3분간 더 익히라는 뜻이다. 총 12분간 익혀야 하는데 나는 10분도 안되어 불에서 내린 것이다.
알리오 올리오를 실패하고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파스타에 대해 공부했다. 토마토 파스타와 크림 파스타를 조금 능숙하게 만들 때쯤이었다. 파스타가 이태리어로 반죽으로, 면 요리를 통칭한다는 것과 롱 파스타와 리본 파스타, 쇼트 파스타로 나뉜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파스타의 동의어로 알고 있었던 스파게티가 롱 파스타의 일종이라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적어도 내게는 지동설을 처음 듣게 된 조상들의 심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파스타 패키지에 적힌 LINGUINE의 비밀도 풀렸다. 롱 파스타에서 스파게티, 부카티니 다음으로 굵은 면이 링귀니였던 것이다. 그제야 턱이 아플 정도로 면이 익지 않았던 의문이 완전히 해소됐다. 자욱한 안개가 말끔히 걷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