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UX라이팅을 처음 시작할 당시, 문장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쓸지 오랫동안 붙잡고 고민하곤 했다. 한 문장을 위해 여러 케이스를 비교해 보고, 단어의 결을 따져가며 시간을 쓰곤 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 일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바로, AI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chatGPT가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해도 그래도 글은, 사람이 더 잘 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AI는 마치 신생아와 같아서 한눈팔 때마다 불쑥 자라는 존재였다. 아무리 그래도 기계 같던 녀석이 어느새 문장을 다듬고, 결을 맞추고, 언젠가는 나보다 더 조리 있게 글을 쓰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한참 고민하던 문장을 AI가 먼저 제안했을 때 결국 결심했다. AI를 피할 수 없다면 즐기겠다고. 그래서 요즘은 오류 페이지, 공지사항과 같이 어느 정도 형식을 만들어둔 문장들은 AI에게 초안을 맡기고, 나는 그 문장을 검수하거나, 다듬거나, 방향을 수정한다. 그리고 문장 하나하나보다는 전체 맥락을 설계하고 조율하는 일에 더 집중하고 있다.
UX라이터로 일하다 보면 아래 난관에 자주 부딪히곤 한다.
기존 문장의 문제는 보이지만, 어떤 문장으로 고쳐야 할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
고쳐야 할 방향은 감이 오지만, 그 사이의 논리가 글로 정리되지 않을 때
원래 저 난관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쓴 문구를 동료들과 자주 논의하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내가 쓴 문구를 누군가에게 자주 보여주려 하는 편이지만 매번 보여주는 것을 쉽지 않다. 회사는 늘 바쁘고, UX라이터는 보통 조직 안에서 혼자이거나 소수인 경우가 많아 함께 고민해 줄 사람이 항상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나는 AI에게 몇 가지 문장을 제안해 평가를 부탁하기도 하고, 내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내용을 문장으로 끌어내게 돕는 역할을 맡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서비스의 톤과 사용자 경험에 맞는 문장을 고르며 방향을 잡아간다.
혼자 일하다 보면 나만의 시선에 갇히기 쉬운데, AI는 그런 시야를 가볍게 넓혀주는 동료 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혼자서 모든 문장을 작성해야 했던 예전보다, AI와 일하는 지금이 덜 외롭고 든든하다.
UX라이터라는 직업이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하더라도 UX라이터가 직접 문장을 쓰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앞단의 일이 중요해졌다. 아니, 어쩌면 원래도 UX라이터의 본질은 그 앞단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AI가 어떤 문장을 추천하고 작성할지 결정하는 데 핵심이 되는 건 그 서비스의 언어 정책과 라이팅 가이드다. 내가 맡은 서비스의 경우 문장부호, 띄어쓰기 등 브랜드의 어조와 서비스 환경에 따라 국립국어원 기준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규칙들을 정리하고, AI가 학습할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되었다. 글을 '쓰는 사람'에서 글을 '작동하게 만드는 사람'이 된 것이다. 단어 하나를 고치는 것보다, 왜 이 문장이 여기 있어야 하고 사용자에게 어떻게 닿아야 하는지 결정하는 역할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UX라이터'라는 직무에서 '라이터'보다 'UX'에 더 집중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문장 그 자체보다 사용자의 흐름과 맥락을 먼저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어떻게 쓸까’보다 ‘언제, 왜 이 문장이 필요한가’를 먼저 묻고 있다.
한때는 이런 생각도 했다.
'AI가 문장을 다 쓰면, 나는 이제 뭐 먹고살아야 하지?'
사내에서 UX라이팅 AI툴을 만들라는 업무가 떨어졌을 때, 내 일자리를 제 살 파먹으라는 뜻이냐며 속으로 자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AI툴을 만들면서 알게 됐다. AI가 문장을 만들 수는 있어도, 사용자의 맥락과 기획자의 의도를 함께 고려해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까지 만드는 지금도 나는 내 일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비대면 상황에서 서비스가 '살아있다'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
버튼 하나, 알림 한 줄, 오류 메시지 한 문장. 그 안의 말투와 배려가 사용자와 서비스를 연결하는 순간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AI가 문장을 쓰더라도 사용자의 경험을 문장으로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느낀다. AI 시대에 뛰어들며, 앞으로의 UX라이터는 더더욱 'UX'라이터에 가까워져야 한다. AI가 보지 못하는 사용자의 감정,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와 PM의 의도, 그리고 브랜드가 지키고 싶은 목소리를 글로 정리하는 사람. 나는 지금,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