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어렸을 적 나는 자주 고백을 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중간 놀이 시간, 청소시간, 방과 후. 시간이 남는 그때를 틈타 아이를 붙잡고 고백을 하는 것이다.
나, 너 좋아해.
그저 내 감정은 이렇다는 것을 그 아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 아이들에게 똑같은 대답을 듣고 싶었니? 그건 아니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말하고 싶었어. 널 좋아한다는 것을.
그 좋아해란 세 글자가 뭐길래 내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모두 부끄러워했을까. 당시의 어린 나는 결코 어떠한 관계의 진전이나 행위를 바란 것이 아닌데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새빨개진 걸까. 수많은 나의 첫 고백들.
어릴 적, 참 많은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유일하게 이름이 기억나는 한 아이가 있다. 실상 이 목차는 모두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아이는 나의 기억 중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글을 쓰기 전 꽤 오랜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 아이가 이 글을 보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이는 날 기억할까. 여러 생각들을 했지만 지금 이 글이 쓰인 것을 보니 나는 이 기억들을 세상 밖에 꺼내놓기로 결심하고야 만 것이다. 그네 피노키오 그리고 그 아이들. 피노키오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아이가 나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을 했는지 또한. 스물넷이 된 지금의 내가 그 아이에 대해 온전히 가지고 있는 기억은 단 하나. 그 아이를 생각했을 때 들었던 감정의 흔적들. 누군가를 마음에 담았을 때만 가질 수 있는 감정들. 그 감정들은 날아갔지만, 잔흔들은 어렴풋이 남아있는 향기처럼 기억 속에 존재한다.
열한 살, 그리고 열세 살. 열이 난 것만 같은 뜨거운 감정들 속에서 나는 어지러워했다.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를 이야기하려면 초등학교 3학년, 10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열 살의 나는 열렬히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책 속의 인물들은 모두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으며 결말에 상관없이 열렬한 사랑을 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얼까.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는 감정은 무엇이지? 그 아이는 그 수많은 궁금증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아이는 나에게 첫눈이 반한다는 문장의 의미를 알게 했다. 참 우습지, 열 살짜리가 뭘 안다고.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모든 게 진심이었다.
아이는 3학년 2학기 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었다. 나와 같은 학원을 등록했으며 학년에서 가장 키가 커서 금세 아이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학원 뒤편에서 나는 아이를 처음 보았고, 그렇게 첫눈에 반하게 됐다. 시간은 빨리 흘러 우리는 4학년이 되었고, 아이와 나는 마침내 같은 반이 되었다. 키도 성씨도 비슷한 게 없었기에 반 짝꿍을 비롯해 체육 시간, 급식 시간에도 같이 줄을 설 수 없었고 나는 중간쯤 자리에서 가장 뒷자리에 있는 아이를 지켜보아야 했다. 흐릿하지만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처럼 장난기가 다분한 아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묵한 그 아이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들과 함께 교실 가장 뒤에서 놀곤 했다. (뭔가 적어가면서 기억 속에서 각색과 미화가 시작됐음을 느끼고 말았다. 이건 온전히 나의 기억이다. 실은 나 자신조차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헷갈리는 상황에 이르기 시작했다. 이 주제는 다분히 필자가 주장한 내용이나 글을 적어가면서 점점 후회하고 있다. 누가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수정이 일어날 회차임을 직감하고야 만다.)
아이는 하모니카 부장이었다. 나는 하모니카를 썩 잘 부르지 못했는데 아이 앞에서 하모니카 검사를 맡아야 하는 시간은 참 고역이었다. 서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아이는 엉망진창인 나의 연주를 몇 번 듣다 마침내 통과를 말했고 가장 기쁜 순간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도 내 연주를 듣는 게 고역이어서 통과를 외쳤을까? 역시 사람의 기억은 미화된다.
그때 한창 즐겨 읽던 책이 있었는데 아마 언니가 사 온 책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런 책을 왜 사 왔는지가 의문이다. 소녀들을 위한 생활 백서 비슷한 책이었다. 책은 소녀들을 위한 유용한 생활 지침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생활 습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고백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로 저 마지막, 고백에 대한 내용은 나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그동안 내가 아이들에게 했던 고백은 고백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 같은 독서 소녀(당시 나는 별명이 책벌레였다.)에게 걸맞은 고백 방법이 있었다. 점점 쓰면서 그날의 괴로운 기억들이 해제되고 있다. 도대체 열한 살의 나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가 참 신기할 따름이다.
그 고백 방법이란 바로 동화 속의 인물이 되어 편지를 쓰는 것이다. 동화 속의 인물의 이름을 빌려 대신 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때 편지에서 사람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동화 속의 인물임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다. 수많은 고백 방법 중에서도 이 방법은 당시 열한 살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고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걸맞은 고백이다라고 확신하고야 말았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날의 나를 말리고만 싶다. 아니, 말리는 것이 문제일까. 그냥 그날 학교를 가지 못하게 했어야 한다.)
내가 선택한 인물은 바로 '피노키오'였다. 편지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서론은 나는 동화 속 피노키오고 오랫동안 너를 지켜봐 왔다는 걸 밝히는 것이었다. 좀 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그래서 아이에게 아이의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해주라고 부탁하는 내용을 적었던 것만 같다. 이게 참 웃긴 대목이다. 고백 편지인데 고백은 안 하고 갑자기 고민을 말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때의 나는 공책 한 장을 뜯어 빼곡히 이러한 내용을 적었고 아이의 사물함에 얌전히 넣어놓았다. 아이가 답장을 주기를 바라면서.
다들 그 시절의 그 아이를 떠올리고 있을까. 이때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그 시절 그 아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른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얼굴에 티가 나버려서 다른 아이들은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물함에 그 편지를 넣어놓자마자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보다 먼저 사물함에 달려가고야 말았다. 용케도 아이들은 내가 그 아이의 사물함을 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편지를 모두 보고 나서야 그 아이는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나는 도망가고야 말았다. 고민을 들어주는 피노키오는 눈물로 얼룩졌다.
그날 밤 네이버 쪽지로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실은 그 편지를 썼던 것이 나였다고. (아이는 그 편지를 읽을 때도 그 편지를 쓴 이가 누구인지 몰랐었다.) 전부터 너를 좋아해 왔다고.
그 이후로도 아이를 꽤 오래 좋아했다. 빼빼로 데이 때 빼빼로를 줬으며 화이트데이 땐 사탕을 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망갔다.
그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중에 나란 사람이 널 좋아했다는 것을 기억해줘.
누군가의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진 행위다. 난 그렇게 아이에게 기억되고 싶었다.
아이와는 중학교가 달라지고 난 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아이는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그렇지만 그 아이를 좋아한 이후로 달라진 점들이 있었다. 다시는 쉽게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게 됐다는 것, 고백이란 것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 세월이 흘러 10년이 넘게 흘렀고 아이와 난 스물넷이 됐다. 한 친구와 10년도 더 넘은 이야기들을 했고 그 당시 그 아이를 좋아했던 이들이 꽤 많았던 것을 알게 됐다. 지금 나의 기억 속에 아이는 여전히 열한 살, 그리고 열세 살의 아이로 남아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얻고 싶어 그렇게 고백을 했던 것일까. 지금이나마 어렴풋이 알게 된 것만 같다.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고 싶었던 걸까, 난. 잊히는 게 두려웠던 것만 같다.
어찌 되었든 나는 아이를 좋아했던 그 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 있게 첫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아이 덕분에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기억들이 있다. 지금 아이는 나를 기억할까.
글쎄. 언젠간 순간순간들 속에서 마주칠 수 있겠지. 만약 만나게 된다면 말해주고 싶다.
널 많이 좋아했다고. 덕분에 소중한 감정들을 얻을 수 있었다고.
지금 나의 감정은 다시 한번 흐름을 탈 준비를 하는 중이다. 또다시 사랑을 하게 되면 거침없이 밀려가겠지. 그 수많은 감정의 흐름들 속에서 나는 언제든지 몸을 맡길 준비를 하고 있다.
* <교차로입니다 서행하세요>의 여덟 번째 글입니다. 이 매거진은 같지만 다른 점이 많은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각기 다른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