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초등학교에서 이따금씩 이런 설문조사를 했다. 목적은 독서량과 학습 결과를 비교하기 위한 거였다나..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질문은 이런 식이었다.
'집에 책이 몇 권 있나요?'
[1번. 10권 이하] [2번. 10권~50권] [3번. 50권~100권] [4번. 100권 이상] [5번. 기타]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5번 기타'에 체크하곤 했다. 글쎄요, 우리 집엔, 아마도 1000권쯤?
정확히 세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1000권도 훌쩍 넘는 수였을 것이다. 거실 두 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동화, 고전, 위인전 등의 책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빼곡히 차있었다. 그리고 동생들과 나의 방에도 커다란 책장이 하나씩 있었으니, 어릴 적부터 책에 둘러싸여 보냈다는 건 굳이 더 말로 하지 않아도 알 만할 것이다. 나는 항상 학교에서 다녀오면 집에 와 책을 읽었다. 정말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읽었다. 엄마는 항상 공부보다 독서를 중요시해서, 내가 공부 대신 책을 읽고 있어도 잘 혼내지 않았다. 공부를 안 하는데, 혼나지도 않다니! 그래서 어렸을 적 나에게 책 읽는 시간은 항상 자유의 시간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책 속에서 파묻힌 채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글 쓰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까짓 거, 나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까이하던 게 책뿐이었으니, 좋아하는 것도 그것밖에 없었다. 그때는 글로 성공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지만, 지금은 딱히 그런 야망은 없다. 그저 좋아서 읽고, 좋아서 쓰는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있을 뿐.
문예창작을 전공하며, 다른 종류의 책들보다는 소설을 많이 읽게 되었다. 소설에는 허구의 세계가 있었고, 그 허구의 세계가 가진 진실된 삶이 있었다. 사실 문예창작을 전공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설을 그리 즐겨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본격적으로 글을 배우게 되며 소설의 맛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전에는 고전 소설을 즐겨읽긴 했지만, 현대 소설을 그리 가까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손보미 작가님'의 글을 좋아했다. 가장 처음으로 손보미 작가님을 접한 작품은 '담요'였다. 작가님의 등단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아이를 잃은 부모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소설이다. 작가님 특유의 담담한 문체 때문인지, 분명 슬픈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그리 슬프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을 전부 읽고 나서, 텍스트를 덮고 나서야 뒤늦게 그 슬픔이 밀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감정을 느끼고서, 한동안은 그 작품만 반복해 읽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뒤로, 작가님의 작품을 쭈욱 읽어왔다.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연의 신>, <작은 동네>,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등등.. 각 작품들에 담긴 이야기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치 잠시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장 최근엔 <작은 동네>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https://brunch.co.kr/@soool08/23) 그 작품에선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매력을 엿볼 수 있었다. 다른 분들께도 꼭 한 번 추천드리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특히 손보미 작가님의 기존 작품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더더욱이.
아무튼, 작가님의 작품에 푹 빠지게 된 이후로는 '과연 소설의 매력이 뭘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대체 소설이 뭐길래, 내가 이토록 소설을 읽고 싶고, 쓰고 싶어지는 걸까. 최근에 한 책을 읽다가, 나의 이런 질문에 대답이 될 것 같은 구절을 발견해 한 번 소개해보고자 한다.
인간 행위를 기술하는 방식에는 문학 이외에 육하원칙이 지배하는 신문기사가 있다. 두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사건은 결국 인간 내면의 작용인데, 기자들은 주로 외형적 행위와 그 결과에만 치중하고 내면의 동기는 돈, 욕정, 복수심 등으로 간명하게 유형화하곤 한다. (중략)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법관으로 일해온 경험에 비춰보면 실제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상당수는 인과관계도, 동기도, 선악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신문기사처럼 몇 문장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냉정한 ‘팩트’ 집합으로 보이는 신문기사보다 주관적인 내면고백 덩어리로 보이는 문학이 실제 인간이 저지르는 일들을 더 잘 설명해줄 때가 많다.
-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2015, 문학동네>
'주관적인 내면고백 덩어리로 보이는 문학이 실제 인간이 저지르는 일들을 더 잘 설명해줄 때가 많다.'
어쩌면 소설에 대한 관심은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인간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문학을 전공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 가만 생각해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책이 보여주는 것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나도 그런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데 함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소설은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타인의 이야기이고, 타인의 삶이고, 결국은 세상의 단면이다. 마블 영화에서는 영웅이 위기에 빠진 세상을 손쉽게 구해낸다. 하지만 누구나 알듯이, 이 세상에 그런 슈퍼 히어로는 없다. 하지만 이곳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그려보려는, 수많은 작가님들이 계시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언젠가 한 번, 대학 수업에서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저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글을 써요' 그래, 나도 처음엔 그런 마음으로 글을 썼던 것 같은데. 그 친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나도 언젠간 그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 그전에,
창문 넘어 도망친 소설들 먼저 붙잡고 나서!
<교차로입니다 서행하세요>의 아홉 번째 글입니다. 이 매거진은 같지만 다른 점이 많은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각기 다른 글을 씁니다.